'블레이드 러너' '에일리언' '글레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
이 네 영화에서 키워드를 골라 내면 칼, 차가운 쇠, 근육질, 그리고 피일 것이다. 따스함이나 달콤함은 어느 구석에도 엿보이지 않는다.
16일 개봉한 '어느 멋진 순간'(A good year)은 도시에 찌든 남자의 '포도밭 사랑이야기'다. 위의 네 작품은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했다. 주연도 러셀 크로. 'LA 컨피덴셜' '글래디에이터'의 야수 같은 캐릭터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감독과 주연배우가 피 대신 포도주를 음미하며 인생의 가장 멋진 순간을 되새김한다.
선 굵은 남성적 감각이 로맨스와 전혀 어울릴 것 같이 않는데, 영화는 여전히 완성도 높은 '리들리 스콧표'다.
한 남자가 있다. 런던 증권가의 펀드 매니저 맥스 스키너(러셀 크로). 인생의 최고 가치는 돈이다. 동물적 감각으로 '사고 팔아' 엄청난 이익을 올리는 사내다. 늘 그렇듯 비정하기도 하고 여자도 많이 밝힌다.
그에게 프랑스에 있는 헨리 삼촌(앨버트 피니)의 부음 소식이 온다. 유일한 혈육으로 포도밭과 저택을 상속받는다. 비싸게 팔아넘기길 요량으로 프로방스로 가지만, 실수를 연발하고 결국 발이 묶이게 된다.
자전거를 탄 패니(마리온 꼰띨라드)를 칠 뻔하고, 치마를 걷어 올려 멍을 보여주며 따지는 '까칠'한 프랑스 처녀에게 매력이 끌린다. 처음 "멋진 엉덩이네!"라며 본성을 드러내던 맥스는 차츰 그녀의 영혼까지 사랑하게 된다.
도시에 찌든 이가 시골로 가서 삶의 참 맛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그리 신선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생기가 넘치고, 멋도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차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 마치 와인을 숙성하듯 맛깔스럽다. 프로방스의 풍광과 포도밭 고택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은 아련한 추억에 빠지게 한다.
프랑스 남부의 평화로운 삶을 담아온 원작자 피터 메일과 실제로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는 스콧 감독의 와인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다. 영화 내내 와인을 마시고 싶은 느낌을 자극한다. 음악도 차분하게 청각을 간지럽게 한다. 마르크 스트라이텐펠드의 솜씨다.
원제 'A good year'는 말 그대로 가장 멋진 해라는 뜻도 있지만, 최고의 포도를 수확한 해를 뜻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입이 썬 포도가 최고의 와인을 만들듯, 흠 있는 남자가 가장 아름다운 영혼, 최고 품종으로 거듭나는 것도 뜻한다.
오감을 두루 자극하는 이 영화가 영혼마저 자극하니 '육감의 영화'라고 해야 할까.
이 가을, 잊고 있던 사랑이 있다면 찾아도 좋을 것 같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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