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고려의 사경' 펴낸 권희경 교수

입력 2006-11-18 07:27:00

"사경(寫經)은 고려 미술의 꽃입니다."

고려하면 대부분 청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관심이 불화(佛畵)로 옮겨가고 있다. "그러나 진짜 고려의 아름다움은 사경이죠."

평생을 사경 연구에 바친 권희경(66)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가 필생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1천여 장의 사진과 7천여 매의 원고를 정리해 '고려의 사경'(글고운 펴냄)을 펴냈다. 처음 사경 연구를 시작한 지 34년만의 일. 30대 초반의 열혈한 불교미술 여학도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그래도 눈빛은 불상의 광배처럼 반짝이고, 책을 넘기는 손길은 여전히 열정이 가득하다.

사경은 아직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불교미술품. 불경의 내용을 정성스럽게 옮겨 적고, 화려하게 장식하여 꾸민 것을 말한다. 두꺼운 닥종이 위에 금과 은으로 불경을 그림으로 또 글로 적어놓은 것이다.

"처음 사경을 시작한 것은 경전을 배우거나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석가가 열반한 후 불경은 제자들에 의해 구송(口誦)으로 전해지다가 문자화됐는데, 사경은 경전이 문자화된 이후에 시작된 것이다. 처음 포교목적으로 필사(筆寫)하던 것이 목판인쇄가 나오면서 공덕을 기리는 목적으로 바뀌었고, 더욱 화려하고 귀하게 치장됐다.

고려 사경을 총망라해 책으로 펴낸 것은 이번이 처음. 그리고 사경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권 교수가 처음이었다. 고려 사경은 권 교수 연구의 처음이자 끝인 셈이다.

1972년 일본 큐슈대학에 유학하면서 그의 여정이 시작됐다. 당시엔 입학할 때도 논문을 제출해야 했다. 그때 논문이 '고려의 지장보살화'. 그러나 일본 불교미술의 히라다 유다카 교수는 불화 보다는 고려 사경을 연구하는 것을 권했다.

"사경이 그리 귀한 것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유다카 교수는 석사논문과 박사논문까지 '고려의 사경'으로 지도했다. 권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도 "늦게나마 유다카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적고 있다.

20년 전 첫 '고려사경의 연구'를 책으로 펴냈다. 500권 한정판으로 냈다. "오·탈자는 물론 오류도 있었지만 유일한 책이다 보니 아직도 이 책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사이 개정판을 내야한다는 압박감은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작업하기엔 너무나 방대해 미루다보니 20년이 흘렀다.

마치 치통처럼 마음을 무겁게 하던 사경연구는 정년퇴임 1년을 앞둔 지난해 다시 불붙었다. "학계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강박관념이 용기 아닌 용기를 불러일으켰죠."

그간 일본 학자들의 이의제기에 조목조목 논박을 하며 한일간 사경연구의 핵이 되기도 했다. "이제는 일본학자가 사경을 보내줍니다. 감정을 해달라고 말이죠." 그간 한국의 역사연구에 쌍심지를 켜는 일본학자가 귀중한 자료까지 보내면서 감정을 부탁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책은 제1부 고려사경 총설과 제2부 고려사경 표지화, 제3부 고려사경 변상화(불교전설이나 설화를 그린 그림)로 묶었다. 국내 박물관과 미술관 뿐 아니라 일본에 가 있는 사경자료까지 망라했다.

자료정리에만 1년이 걸렸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느라 손목과 어깨에 무리가 갔고, 운동을 못해 당뇨까지 악화됐지만, 그녀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교정도 8번이나 보느라 눈도 많이 침침해졌다. 인쇄 후에도 잘못된 8쪽을 들어내고 새로 짰다. "죽어도 그냥 낼 수 없다고 하니 출판사로서도 어쩔 수 없었죠."

고려사경은 불교예술 뿐 아니라 서지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또 서체와 발원문, 그림을 보면 시대적 배경과 사상적 특징, 그 당시 사람들의 삶까지 녹아 있다.

권 교수는 이 책에 이어 '고려사경의 작품론'을 준비 중이다. 일반인들이 더욱 이해하기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30여년 연구의 막바지에 선 권 교수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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