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천주교 성지⑧-문경 여우목

입력 2006-11-16 07:22:59

낭패였다. 지난 9일 아침 일찍 안동교구에 들렀다가 예천을 거쳐 문경 여우목 성지를 찾아 나섰는데 난데없이 비바람이 몰아쳤다. 한낮인데도 사위가 어둑해질 정도였다. 믿음을 받아들인 첫날부터, 이승에서의 삶을 다하는 그날까지 주님을 모셨던 이윤일 성인의 순교 신심을 찾아가는 초행길에 예보에도 없던 늦가을비가 뿌려댔다. 추색완연한 경천호수로 떨어지는 비를 뒤로하고, 동로면에서 901번 도로를 타고 가니, 어느 순간 여러 명이 쉬어가기 넉넉한 대미산 중턱이 나타난다. '여우목 성지' 안내 입간판이 서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바로 이윤일 성인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사시다가 병인박해 때 붙들려간 '여우목 공소'가 눈에 띈다. '여우목 공소'에서 천주교대구대교구 제2주보인 이윤일 성인의 삶을 떠올린다. 무엇이 이윤일로 하여금 고향(충청도)을 버리고 피붙이 하나없는 백두대간 심산궁벽 이곳까지 스며들게 했을까? 왜? 주모송을 바치며 생각한다. 여우목은 평범한 사람이 천주를 받아들이고, 하늘나라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겪어야하는 고뇌의 현장이 아닐까? 회개하며, 여우목 공소에서 조금 떨어진 여우목 성지에 다다르니 비는 어느새 그쳤다. 낙엽으로 장관을 이룬 길을 지나 여우목 성지 야외 제대에 이르니 붉게 산노을이 야외 제대 위 십자가를 비추고 있었다. "아!"

◈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 문경 여우목

경북 서북단에 있는 문경은 19세기 이래로 한국천주교에서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소백산맥을 끼고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경상도의 관문이며, 또한 산악지대여서 일찌기 서울과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신자촌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다. 한실, 건학, 부락이, 여우목 등이 대표적인 신자 공동체이다. '사학징의'에 따르면, 1801년 신유박해 때 경기도 출신 여교우 이철임이 경남 웅천으로 귀양오는 도중에 문경에서 물고를 겪으며 순교했다. 또한 이곳 문경새재 수구(水口)는 발로 뛴 전교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던 최양업 신부가 과로와 장티푸스로 발병 급사, 운구된 현장(문경읍 진안리)이기도 하다. 문경에서는 병인박해때 60여명의 신자들이 끌려가 박해를 받았고 이윤일 요한, 박상근 마티아(마원공소) 등이 순교했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아들 이요한(혹은 시몬)과 전 사베리오도 건학 신자촌에 살다가 병인박해 직전, 순교했다.

◈ 이윤일이 전교회장 맡으며 신앙공동체 이뤄

원래 충청도 홍주(현 홍성) 사람이던 이윤일(1823-1867) 성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박해를 피해 경북 문경 여우목(중평리)로 이사를 왔다. 맑은 물이 펑펑 쏟아지고, 양지바른 여우목은 산이 깊어 유사시에 마을 뒷쪽으로 도망가기 좋았다. 지금은 다섯 가구 만 살고 있지만, 당시 여우목 전교회장 이윤일은 30 여호나 입교시켰다. 이윤일 성인의 초상화에서 손에 든 십자가는 그가 전교회장이었음을 뜻한다. 온순한 성품으로 천주를 모시며, 평화롭게 살던 이윤일은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1866년에 시작, 6년 이상 계속된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천주교는 8천명 넘는 순교자를 냈다. 박해 직전 2만3천명에 이르던 신자의 35%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먼저 죽이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가 적용되던 병인박해가 터지자 문경관아의 포졸들이 1866년 11월 18일 여우목 교우촌을 습격했다. 이윤일 성인을 포함한 신자 30 여명이 붙잡혔다. 문경 관아로 끌려간 이윤일은 3일 동안 뭇매를 맞은 뒤 상주로 이송되었다. 상주에서 한달여 옥살이를 하면서 무려 9번의 혹형과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윤일은 괴로운 표정을 짓지 않고 기도로 일관했다. 이 성인의 흔들림없는 자세는 박해받는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 나는 순교하러 간다. 너희도 따르라

사형을 선고받은 이윤일 성인은 1867년 1월4일 대구관아로 압송되기 직전, 자녀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킨 뒤 나를 따라오너라." 현실적인 속박으로 인해 이승에서 부모 자식간에 다 풀지 못한 육친의 정을 하늘나라에서 만나 영원히 함께 복락을 나누자는 권유였다. 1867년 1월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를 당할 때도 이윤일 성인은 '평화' 그자체였다.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월한 것이다. 성호를 긋고 조용히 엎드려, 참수를 당했다. 순교자의 성혈이 사방으로 튀어, 대구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되었다. 이윤일의 유해는 형장 근처에 임시 매장→비산동 날뫼→경기도 용인→미리내→대구대교구청 성모당을 거쳐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됐다. 이문희 대주교는 20년전인 1987년 1월21일 대구대교구의 제2주보로 선포했고, 대구관덕정은 이 성인의 순교신심과 구원에 대한 확신과 그리고 진지한 삶의 자세를 닮기 위한 이윤일 요한제를 열고 있다.

◈ 박해 이후 부서진 신앙공동체

박해 이후 여우목 공소는 철저하게 파괴됐다. 여우목 일대에서만 60 여명이 끌려갔던 터라, 신앙공동체는 그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서졌다. 그 여파가 아직까지 미치고 있다. 과거 신앙공동체가 있는 중평리 마을에 지금은 다섯 가구가 살고 있는데 교우는 한 집도 없다. 전교가 시급하다. 하다못해 출장(out-reach) 전교라도 해야할 것 같다. 최근 천주교대구대교구 순교자현양후원회는 여우목 공소에 일부 대지(300평)를 확보하여 문경지역을 관할하는 안동교구로 넘겼으며, 안동교구는 문경성당을 통해 여우목 성지의 관리하고 있다. 이윤일 성인과 순교자 서인순 그리고 다수의 무명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증거한 것을 기려기 위한 여우목 성지는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대지 1천255평에 대형 십자가, 14처, 야외 제대 등을 갖추었다. 문경 태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여우목 성지를 순례하면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신앙의 자유를 부여받은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곰새겨 보게 된다. 키큰 낙엽송들이 장관을 이룬 여우목 성지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사유지여서 출입을 제한받는 현실을 고치고, 성인의 삶의 체취가 녹아있는 여우목 공소를 신앙공동체로 재개발하는 일, 우리 모두의 신앙과제이다.

글 최미화 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 김태형 기자 thkim21@msnet.co.kr

도움 천주교안동교구 사목국 마백락 영남교회사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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