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농촌체험] (25)영주 소백마을

입력 2006-11-16 07:34:29

십승지(十勝地)의 으뜸답다. 소백산 자락 깊은 계곡 속에 자리잡은 마을은 바깥세상의 환란과는 완전히 단절돼 있는 듯하다.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 너머, 하얀 서설(瑞雪)로 반짝이는 비로봉(1천439m)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이 곳이 바로 선계(仙界)가 아닌가!

6·25 전쟁을 피해 십승지를 찾아 든 민초들의 후손답다. 마중 나온 김낙준(50) 마을대표의 풍모에서 도인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청정자연 속에 욕심 없이 땅을 일구며 살아온 덕분일까. 길게 늘어뜨린 수염 뒤에 숨어 있는 웃음은 어린아이처럼 해맑기 그지없다.

"저희 마을은 6·25 때만 해도 350여 호가 모여 살 정도로 꽤 컸습니다. 하나둘 떠나면서 이제는 70여 호가 남아 약초 캐고 농사 짓고 사는 조그만 산촌이지만요."

김 대표의 간단한 마을 소개에 이어 옥수수 막걸리 빚기가 시작된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아이들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고 어른들은 군침을 삼키기 바쁘다. 갓 만든 따끈따끈한 두부, 알맞게 익은 김치 한 젓가락, 막걸리 한 잔에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진다.

산죽(山竹)은 각종 성인병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싸리나무 대신 빗자루를 만드는 재료다. 이왕이면 하나라도 더 얻어가라는 마을 어르신들의 배려가 느껴진다. 하기야 대부분 아파트에 사는 요즘, 마당 쓸 빗자루가 필요하기야 할까마는.

가는 댓가지를 칡넝쿨로 묶는 간단한 작업이지만 컴퓨터 자판에만 길들여진 도시아이들 손길로는 꽤 어려운 모양이다. 보다못한 장태홍(58) 풍기읍장과 주민들이 나서서야 모양새가 갖춰진다. "이거 오늘 큰 수확을 얻었는데요. 집 거실에 걸어두고 이웃들에게 실컷 자랑해야겠습니다."

마을 구판장 주인 유재하(60) 씨의 하모니카 연주는 아련한 옛 추억으로 이끈다. '학교 다닐 때 나도 좀 불었는데….' '정말 할아버지 멋있다. 나도 배워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모두는 하나가 되고 앵콜 요청에 유 씨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힌다.

마을 김낙준 대표의 집, '소백산방으로 향하는 길은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다. 하지만 휘영청 밝은 달과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에 운치가 그만이다. 행여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걷는 동안 꼭 쥔 가족들 손에서는 행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낮에 빚은 막걸리와 삼겹살, 모닥불 곁 정다운 대화는 밤이 깊도록 이어지고….

마을 할머니들이 정성스레 챙겨주는 아침식사를 든든히 챙긴 뒤 천년고찰 비로사 유람에 나선다. 겨우 두 돌이 지난 한지원이는 엄마 품보다 이진숙(37·여·대구 북구 복현동) 씨의 등이 더 좋은가보다. 뒤따르는 아이들의 투정이 조용한 산길에 울려퍼진다.

'시나노 스위트' '알프스 오도메' '홍로'…. 이름조차 낯선 다양한 사과들이 붉게 익어가는 사과밭에선 모두 부자가 된 듯하다. '이 놈도 맛있어 보이고 저 놈도 좋아보이고.' 사과 한 상자 따는 데도 고민들이 참 많다. 하나는 입으로 가고 하나는 바구니로 가도 사람 좋은 김 대표는 너털웃음만 터트린다.

영주의 자랑,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 모두들 가슴에는 같은 소망이 싹튼다. '이 아름다운 우리 농촌, 우리가 지키지않으면 누가 지키겠니!'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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