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이정록 作 구부러진다는 것

입력 2006-11-09 07:49:41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지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꼬투리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햇살 때문만이 아니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꼬투리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꼬투리도

솟구치는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구부러지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굴복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잘 익은 고추의 꼬투리는 구부러져 있다. 그러고 보니 해바라기의 목도 구부러져 있다. 물고기도 '물살을 차고 오르기 때문'에 등이 휘는 것이다. 이쯤에서 '구부러진다는 것'은 결코 굴복이 아님을 안다. 해를 향하여 타오르는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하'고 '햇살 쪽으로 디밀어 올리'는 고추의 '깡다구'가 구부러지게 하는 것이다. 그 구부러지는 '깡다구'가 있었기에 '고추는 죽어서도 매'운 것이다.

그렇다. 구부러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래야만 꿈을 향하여 열정을 태울 수 있을 것이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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