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황 영감의 고추 농사

입력 2006-11-07 07:18:42

"뭐라캐도 이 고추밭이 우리 집 곳간이여. 큰 놈 작은 놈 대학 공부시킨 것도 이 고추밭이고, 올 봄 딸년이 시집가면서 가져간 텔레비전이며 냉장고며 이불보따리도 이 밭뙈기가 준 것이여. 말하자면 우리 식구들 목숨줄이제. 헌데 이것 참, 올해 고추 딸 일이 걱정이여. 자식 놈들도 다 떠나가고 할망구도 허리를 다쳐 누워있으니, 또 이놈의 고추 따는 일은 도무지 기계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걱정을 궁시렁 궁시렁 입에 달고 지내던 황 영감은 문득 그저께 시장터에서 본 곡마단의 원숭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영감님은 한달음에 장터로 달려가 원숭이 세 마리를 고추 200근 값을 주고 사왔습니다.

'이놈들을 잘 훈련시키면 되겠지. 사람 흉내를 그렇게도 잘 내는데.' 영감님은 매일 매일 원숭이들을 경운기에 태우고 산비탈 고추밭으로 올라가 고추 따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자 원숭이들은 영감님의 기대대로 제법 포대를 메고 고추밭 이랑을 따라다니며 고추를 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원숭이들은 영감님의 울화통에 생솔가지로 불을 지피기 시작했습니다. 영감님이 쉴 참에 밭둑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면 자기들도 고추 포대 팽개치고 달려 나와 담배를 달라고 떼를 쓰는가 하면,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어느새 고추밭을 벗어나 밭둑의 참나무 소나무 가지를 타고 놀며 히히덕거렸습니다. 끼니때마다 반찬 투정이요, 밤마다 비단 이부자리 타령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지경이라 견디다 못한 영감님이 '원숭이님들, 내 당신들을 놓아드릴 테니 동서남북 어디로든지 제발 가버리십시오.'라고 엎드려 사정해도 '데려올 때는 언제고 함부로 해고하려느냐.'며 대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고추포대를 뒤집어쓰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복지 정책 외면하는 황 영감은 각성하라!!'고 외쳐대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영감님은 하는 수 없이 장날마다 일찍 따 말린 고추를 싣고 나가, 조상님 제사상에도 올리지 못했던 온갖 과일을 사다가 원숭이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안방 이부자리까지 원숭이들에게 내주고 헛간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꼬락서니가 어디 있느냐며 화를 내는 할머니를 겨우 겨우 달래면서, '요 녀석들, 어디 두고 보자.' 며 이를 갈았지만, 대책 없이 가을만 깊어 곳간에는 마른 고추 한 근 남아나지 않았음은 물론, 끝물을 달고 섰던 고추밭의 고추포기들도 된서리를 맞고 쓰러져 말라비틀어지고 말았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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