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 (45)청마와 그의 시, '대구에서'

입력 2006-11-06 08:23:46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시인이 대구와 깊은 연을 맺은 것은 1954년 봄부터였다.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과 전임강사가 되면서였다. 같은 해에 이 학교의 영문과 전임강사를 함께 시작한 인연으로 김종길(金宗吉)시인과는 열여덟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향촌동시절의 막역한 술벗이 된다.

그렇지만 해방직후 통영(統營)여중 교사로 있던 청마가 대구와 처음 인연을 맺기는 1946년 가을이었다. 향토시인 이윤수의 회고기에 따르면 이해 9월 12일 시집('생명의 서') 출판일로 상경하던 도중 잠시 들린 뒤, 11월 27일에는 작심하고 대구를 찾아와, 죽순동인들과 며칠을 보냈다. 이때 동인들의 간청으로 주석에서 낭송한 자작시가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바위'였다.

'전신의 힘을 다 해 목 줄기에 핏대를 세워가며 저음으로 또박또박 암송'하는 청마의 자작시 낭송에 좌중은 "전무후무한 감동을 맛보았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출현으로 대구의 시인들도 더욱 창작욕에 불탔을 뿐 아니라, 청마와의 더 잦은 모임을 기대한다. 이런 바람은 뒷날 청마가 대구와 경북의 교직에 종사하면서 실현되지만 그런 가능성을 암시하듯 이날의 두 번째 걸음에서부터 그는 벌써 대구를 소재로 한 시 한 편을 대구의 일간신문에 발표한다. '대구에서'란 시였다.

'동지 가까운 경북 대구의 거리는 흐리어/ 사람마다 추운 날개를 가졌다/ 일찍이 나의 아버님께선 해마다/ 고향의 앞바다 빛깔이 유난히 짙어/ 차갑게 빛날 때면/ 밤일수록 슬피 우는/ 윤선을 타고/ 나의 알 수 없는 먼먼 영(令)으로 가시고/ 가랑이 탄 바지 돌띠 띤 나는/ 수심하는 어머니 반짓고리 곁에 놀며/ 어머니와 더불어 손꼽아 기다렸느니/ 젊은 아버지는 이렇게 이곳 낯 설은 거리에 내려 추운 날개를 하고/ 장기(帳記)를 들고 당재(唐材)초재를 뜨셨던 구나/ 내 오늘 장사치모양 여기에 와서/ 먼 팔공산맥이 추녀 끝에 다다른 저잣가/ 술집 가겟방에 앉아/ 요원한 인생의 윤회를 적막히 느끼었노라.'

모두 17련으로 된 이 시는 춥고 낯 선 대구의 한 술집 가겟방에 앉아, 한약방을 하던 그의 아버지가 약재를 구하기 위해 대구 약령시를 찾아 떠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부친에 이어 자신에까지 이어지는 대구와의 묘한 인연을 담담히 노래한 내용이었다.

'요원한 인생의 윤회'는 이 시를 발표한 8년 뒤에 현실화 되었다. 54년도의 경북대 전임강사 시절과, 55년 1월부터 62년 봄까지의 경주에서의 고교교장 시절, 그리고 다시 1년 3개월간의 대구여고 교장 시절을 통해 청마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이 시절 대구의 이름난 주점거리인 향촌동을 떠나지 않았다. 동갑인 이설주(李雪舟), 박기원(朴起遠)시인과 대작을 하거나, 당시 '대구매일신문'의 문화부장이던 이근우(李根雨)와, 그리고 조카나 아들 벌인 김종길, 허만하(許萬夏)시인 등을 주붕(酒朋)으로 삼아 '사회적 관습이나 금기를 깨고' 대범하면서도 소탈하게 잔을 들던 청마였다.

같은 통영출신으로 대구에서 오래 후학을 가르친 김춘수(金春洙)시인은 해방직후 청마와 첫 대면을 하자 마당에 넙죽 엎드려 큰 절부터 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내가 큰 절을 한 것은 인간 유치환이나 시인 청마에 대한 외경심에 앞서, 바로 청마의 '시'에 대한 존경의 념(念)이었던 것 같다"는 술회였다.

'시'를 향해 큰 절을 할 만한 큰 그릇이었기에 김춘수 역시 큰 시인으로 불리게 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만주시절의 한 두 시편과, 친일단체 '협화회'(協和會) 가입여부에 관한 진위논란이 없지 않음에도 청마와 그의 시가 오래토록 많은 사람들의 우러름과 사랑을 받아온 의미를 새삼 되새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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