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익는 마을 영동

입력 2006-11-01 07:09:09

감이 익는다. 가을이 깊어간다. 감나무 가지엔 주렁주렁 추억이 매달려 있다.

고향집 마당 한편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늦가을 찬바람이 불고 기온이 뚝 떨어지면 감나무는 벌거숭이마냥 진홍빛 홍시만을 매달고 개구쟁이 꼬마들을 유혹하곤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 긴 대나무 장대 끝에 모기장을 오려 만든 망태로 솜씨좋게 홍시를 따주시곤 했다.

유안진 시인의 '감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고향'이라는 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익는 풍경은 언제나 고향집을 생각나게 한다.감은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그래도 조선 팔도에서 이름난 '감나무 골'로는 경북 상주와 청도, 충북 영동과 경남 진영이 꼽힌다. 청도는 반시와 최대산지로 유명하고, 상주는 곶감으로, 진영은 단감으로 유명하지만 영동은 감익는 정취를 느끼기에 제격이다. 이번 주에는 영동으로 가보자. 연인끼리 혹은 가족끼리 드라이브를 겸한 감익는 풍경은 영동만한 곳이 없다. 영동군 어딜 가나 감나무는 지천으로 널렸고 무엇보다 영동군내 어느 읍면을 가나 가로수란 가로수는 모두 감나무로 조성된 독특한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로수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손끝에 와 닿을 정도로 가깝다. 그렇다고 손에 닿는 대로 감을 딸 수는 없는 노릇. 행여 감나무 가로수에 취해 한두 개 딴다면 모를까. 영동읍내 시가지에 심어진 감나무는 30여km에 3천여 그루. 해마다 이맘때는 읍내관통도로는 물론 주택가 골목까지 거리 전체가 감나무 숲을 이뤄 영동군 전체를 연주황 감빛도시로 물들인다. 이제는 영동군내 11개 읍면에 감나무 가로수가 조성돼 있다. 감나무 관리권은 인근 상가와 주민들이 갖고 있다. 이들이 매년 수확하는 감은 50여t.

감나무 가로수길은 지난 2000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가꾸기 국민운동본부가 실시한 제1회 전국 아름다운 거리숲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1970년 영동향우회가 영동이 감 주산지인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내 중심가에 70여 그루를 심은 것이 시초가 됐다. 그 이듬해부터 영동읍사무소에서 본격적으로 감나무심기에 나섰다. 관리 소홀로 실패를 보기도 하면서 80년대 초반까지 감나무는 수백 그루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차츰차츰 800여 그루로 늘어나면서 성과를 보이자 영동군이 군비를 들여 매년 100그루 이상씩을 심은 것이 현재의 아름다운 감나무 거리로 완성된 것이다.

영동에선 감나무 가로수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국도변을 따라 가다가 곶감을 만드는 높다란 시렁이 있는 집을 발견하면 어디든 들어서보자. 그곳은 어김없이 곶감공장이자 직판장이다. 마당 한쪽에서는 익숙한 솜씨로 감 껍질을 깎아내는 풍경이 정겨워보인다. 대여섯 명의 동네 아낙네들이 달라붙어 정신없이 감을 깎고 있다. 일손이 달렸던 것일까. 젊은 장정을 보자마자 일꾼 부리듯 상자 가득 수북이 담긴 감상자를 감 깎는 기계 뒤편으로 올려달라고 한다. 내친 김에 대여섯 상자를 부려놓자 안주인은 감오미자차를 내놓으며 "숙취해소에는 이만한 게 없다."며 후한 충청도 인심을 보여준다.

이번 주말, 안개가 자욱이 깔린 이른 새벽,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감을 찾아나서보자. 아니면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할 때, 국도를 따라 달리다 감나무가 있는 영동으로 길을 잡는 것은 어떨까.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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