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 (44) 박정희와 대구의 묵은 인연

입력 2006-10-30 08:46:44

동대구개발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던 1966년도 후반 어느 날, 태종학(太鍾鶴) 대구시장이 내구(來邱)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업 진행상황을 브리핑할 때였다. 태 시장이 "현재의 대구 중심도로인 중앙통으로는…."하고, 설명해 나가는 순간, 박 대통령이 "중앙통…?"하고 잠시 머리를 갸웃해보였다.

중앙로의 옛 이름인 중앙통(中央通·일제강점기 때의 주오도오리)이란 말에 '박통'이 귀 설어하고 있음을 눈치챈 태 시장은 얼른 부연설명을 했다. "예, 옛날의 그 12간(間)도로 말입니다." 그러자 '박통'은 옛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태 시장의 브리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성내에 그렇게 넓은 도로가 생겼다니 참말이냐?"며, 대구 인근의 촌로들이 주먹밥을 싸들고 구경을 오던 12간도로(약 22m)는 사실 박정희가 대구사범 시절 5년(1932∼1937) 동안 귀향길에, 혹은 휴일이면 곧잘 학우들과 거닐던 거리였다.

비록 톨스토이를 읽기보다 나폴레옹에 더 심취했고, 학업석차보다 교련모범생 소리를 듣기 더 좋아 했을망정, 평생의 처세훈을 닦게 해준 학창시절의 대구를 그가 잊을 리 없었다. 해방 이듬해 봄, 스물아홉의 나이에 귀국한 패전 일본(만주)군 중위였던 그가 학교 동창들과 군대 선후배들의 권유로 다시 군문에 들기로 최종 작심한 곳도 대구였다.

얼마 뒤 '숙군의 악몽'도 겪었으나, 6·25를 계기로 명예회복의 기회까지 잡은 곳 역시 대구였다. 동인동에 있던 육군본부(현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의 중요 정보참모로 근무하던 박정희 중령은 무엇보다 생애 최대의 경사를 거듭 대구에서 맞는다. 1950년 12월 12일, 옥천 처녀 육영수와 치른 대구 계산성당에서의 결혼식에 이어, 52년 2월 2일에는 삼덕동 신혼집에서 첫딸 근혜를 얻어, 범부로서의 행복감도 한껏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부터 대구는 그로서는 묵혀온 야망을 실현시키려 애쓰던 고장이 되었다. 선배 장성들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려다 좌절돼 도미 포병교육생의 일원으로 황망히 동촌비행장을 떠나던 대령 때만 해도 그의 그런 야망은 과대망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6년 뒤, 별 둘을 달고 2군 부사령관이 되어 대구로 좌천돼 왔을 때는 놀랍게도 이미 '5·16등정'의 8부 능선에 올라 있었다.

대구의 이름난 요정에서 후배 군인들과 공공연히 '작당모의'했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집권 민주당정권의 허술한 감시 탓 못지않게 대구가 그에게 준 푸근하고 넉넉한 향정(鄕情) 덕이었는지 모른다. 고향에서 긴장의 끈을 푼 덕에 거사의 마무리 작업을 여유있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대구는 실로 '야망가 박정희'에겐 그 시작과 성장의 터이자, '마무리 실천장'이었던 셈이다.

대통령이 되어 초도순시 차 대구에 오면 보안이 편리한 수성관광호텔에 곧잘 머물렀다. 그가 북창을 통해 무량한 감개에 젖으며, 대구에 대한 적잖은 '채무의식'과 함께 내려다보았을 수성들판은 이제 대구의 노른자위 터가 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포항이나 울산은 물론, 그의 출생지인 구미와 비교해 봐도 '박통'이 대구를 위해 유별나게 배려했다는 증좌는 찾기 힘들다. 동대구개발사업도 정부의 보조나 지원자금에 의존해서라기보다 기채(起債)와 수익자부담금 원칙에 의해 추진된 점이 더 많았다.

그 결과 채비지가 잘 안 팔려 시정살림이 지금껏 휘청거려왔다. 태생적으로 물류(物流)불량의 내륙도시 대구는 그동안 'TK의 본향'이란 겉치레 소문만 요란했을 뿐, 실속도 명분도 없이 빛바랜 자존심만으로 겨우 버텨왔음을 다른 누구보다 서해안의 'TK 알레르기세력'부터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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