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체전, 전국체전은 대구·경북이 분리되기 전에도 제주도 덕분에 겨우 최하위(15위)를 면했다. 분리된 후에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사회체육과에서는 밤중에 팔공산에 가서 제까지 지냈겠는가. 대구시 교육청은 비상이 걸렸다. 모든 장학사는 담당 학교를 배정 받아 지도·격려하고, 교육감은 그것을 또 확인하며 다녔다. 당시 김용대 교육감은 선수들의 이름, 가정 형편까지 파악하고, 어려운 가정은 부모 중 한 사람을 교육청 기능직으로 취업까지 시켜주면서 정성을 다한 결과 성적이 많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자 또 옛날로 돌아갔다.
소년체전은 금메달 수로, 전국체전은 점수로 실적을 발표했다 나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부담을 드릴까봐 체육 선수나 기능경기대회 선수 양성학교 이외는 학교 방문을 자제했다. 그러나 선수가 있는 곳이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그 결과 제 27회 전국 소년 체육대회(1998, 경남)에서 금메달 27개로 3위를, 내가 퇴임하던 2001년 제30회 전국 소년체전에서는 금메달 39개를 획득해서 역시 3위를 차지했다. 그때 육상경기가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10개나 획득하여 완전 '대구판'이 되었다. 사회자는 연신 '대구' 이름을 부르며, 시상도 나에게 의뢰하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전국체육대회도 14위, 그것도 13위와 점수 차가 너무 나서 타시·도를 따라잡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교육의 도시 대구는 그냥 있지 않았다. 점수제인 전국체전에는 럭비, 야구, 축구(처음은 여자가 없음) 등은 1회전만 통과하면 400점, 우승하면 1천450여 점(육상 금메달은 130여 점)이었다. 제79회(1998년)대회에서 대구상고가 야구 은메달, 럭비 동메달, 상서여상에서 탁구 단체 금메달, 경상공고가 태권도 금메달 2개 등으로 남자 9위를 했다. 제80회(1999년)대회에서는 대구상고가 꿈에도 그리던 야구에서 금메달, 럭비에서 동메달, 청구고 축구가 은, 근대 4종에서 달성고가 금 2개를 획득하여 남자 5위. 고등부 종합 6위가 되었다. 제81회(2000년)에서는 대구고 야구가 금, 레슬링 금 6개. 사이클 금 3개 조정 금 2개 등으로 남자 4위, 고등부 종합 7위를 차지했다.
학력은 공부한 것만큼 소득이 나오는데 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공부는 전국에서 1위를 했는데 체육은 힘들인 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그 많은 노력을 쏟아 몸이 피곤해도 참고 전국을 8년간 누볐지만 한계를 느꼈다. 공부는 시설과는 무관하게 열성만으로도 되었지만 체육은 시설과 환경이 매우 중요했다. 점수가 많은 수영 종목 같은 경우 대구는 그러한 시설이 부족하고 환경 또한 좋지 않았다. 시합 도중 실수 하나만 나와도 몇 년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선수와 그를 지원한 선생님이나 학부모는 너무 허탈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결국 운동보다 공부가 훨씬 쉬웠다. 그때 불비한 환경에서 불철주야 선수 지도에 애쓰셨던 지도 선생님께 지면을 통하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오늘, 저의 회고록 연재를 마치면서 그동안 제가 대구 교육에만 일로매진(一路邁進)하다 보니 학생들이나 선생님들께 너무 큰 부담을 드린 점 지면을 통하여 이해와 관용을 부탁드립니다. 또 어려움 속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학교 선생님, 학부모님, 그리고 시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청운의 뜻을 품고 어려움을 이겨낸 당시 학생 여러분에게도 앞날에 행운과 영광이 함께 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김연철 전 대구광역시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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