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거리의 대학 1

입력 2006-10-28 16:47:32

문득 책이 낯설어 보인다. 책은 왜 만들어진 것인가? 간혹 이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가장 익숙해져 있는 주변의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 보이는 현상. 느닷없이 책이 걸려든 것이다. 책은 문자와 떼어낼 수 없다. 문자의 본질은 '저장'이다. 언어를 저장하는 것이다.

언어는 생각하는 도구이며 생각을 주고받는 도구이다. 존재하진 않지만 평균적인 인간은 동시에 16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장이 필요할 만도 하다. 생각은 어디서 이루어지는가? 통상 '마음'이라고 한다. 그 소재의 공급원은 무엇인가?

감각을 통해 인식되는 외부세계, 이미 인식된 것들을 2차 가공하는 의식의 세계가 전부다. 이를 테면 무엇이든 다 생각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들은 언어를 통해 정리되고 문자를 통해 저장된다. 책이다. 책들의 역사적 누적과 체계가 '학(學)'이다. 학자는 책을 쌓아가는 기술자들이다.

잘 분류하여 빈틈없이 쌓아서 넘어지지 않게 하고 그 목록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생각해보자. 책에서 생각이 나오는가? 생각이 나서 책이 되는가? 언젠가부터 책에서 다시 책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대학의 주요한 임무가 되고 말았다. 거대한 기업형 닭장에서 수없이 많은 닭들이 무정란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대학은 학적 체계와 권위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변화무쌍한 현실 외부세계의 다양성을 희생시키고 개별자의 생각과 마음의 역동성을 억압하고 말았다. 박제화된 지식은 생생화육(生生化育)하는 지혜를 가두는 감옥의 형식이 되고 만 것이다. 삶의 지혜로 넘치는 시장통 생선가게 아줌마의 이야기도 책이라는 형식을 빌지 않으면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현장인 시장에, 거리에 대학이 서야 한다. 지식은 전문화될 수 있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다.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전문화된 기술자들을 공급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학적 체계와 권위를 통한 지배에 불과하다.

지혜는 학위를 타고 오지 않는다. 대학은 낮아지고 넓어지고 겸손해짐으로써 대(大)학이 되어야 한다. 시장이, 거리가 온통 대학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최고 명문 서울대 졸업생 상당수의 직업이 과외 선생이다. 지식은 삶의 현장에서 담금질을 해야만 지혜가 된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어 사람을 만들듯이 대학은 시장과 하나가 되어 지혜를 만들어야 한다. 생생(生生)거리대학 그곳에서.

황보 진호 하늘북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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