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성지

입력 2006-10-26 07:02:01

천주교 성지 ⑦

구원을 믿는 선한 열망들이 기적을 낳은 것일까? 처처에 계시는 주님의 숨결인가? 바람조차 목이 쉬어 아픔없이는 님들을 기억할 수 없는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新里) 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는 죽음을 이긴 승리의 화관인 양 노란 들국화가 피어 있다. 고총 사이로 어깨가 닿일듯이 좁게 누워있는 무명 순교자 묘역을 지키고 선 돌 십자가 위로 신비한 생명의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주님의 뜻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겁없이 믿음의 피를 무정한 대지에 뿌리고 흙속에 묻혀있는 보화같은 님들을 만나면 저절로 무한 욕망과 무절제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고, 양들을 위해 죄없이 피를 흘린 주님께 용서와 사랑을 구하게 된다. "피흘려 신앙의 자유를 찾게 해준 순교자들의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살아온 나날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목숨을 내놓는 적색 순교는 하지 못하더라도 매일 매일 생활속에 사랑을 실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땀을 흘릴 줄 아는 백색 순교, 녹색순교의 사도가 되게하여 주십시오."

◇ 꼬장주 신앙과 함께 찾은 조선의 카타콤바

교회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는 믿음이 신실한 할머니들의 변함없는 주님 사랑인 '꼬장주 신앙'이다. 매주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청소하는 할머니들로 구성된 꼬장주 신앙 모임 발바라회원들과 함께 지난 16일 오전 7시 출발, 4시간 만에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新里) 성지'에 도착했다. 평생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을 정갈하게 걸어온 발바라회원들이 찾아온 '신리 성지'는 한국천주교초기사를 이끈 사도 이존창의 생가가 있는 '여사울 성지', 한국 첫 사제이자 순교성인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태어난 '솔뫼 성지'와 함께 국내 대표적인 가톨릭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신리 성지는 박해시절 교우들이 숨어살며 예배를 지내고 장지로 쓴 '조선의 카타콤바'이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다블뤼 비망기'를 집필된 곳이며, 온 마을 사람이 천주교를 믿다가 두려움없이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들의 안식처이다. 지근거리에 있는 합덕 성당은 6.25 때 납북된 페렝 신부와 김대건 신부의 스승 매스트로 신부의 묘소가 있는 충남도기념물(제145호)이다.

◇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초를 만들어진 곳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리 성지는 경부고속도로 목천 IC(독립기념관 IC)-신례원-합덕·당진으로 가면 만난다. 도중에 여사울 이존창 생가가 나오고, 거기서 약 7-8 km를 더 가면 신리 성지가 나타난다. 충청도 내포 평야의 중심에 위치한 신리 성지에 도착하면, 세상의 풍요와 쾌락을 마다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오직 한분이신 천주 만을 믿던 '겁없는 신앙'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천주님이 함께 계시니 '겁내지 말라'(놀리 티메레)던 말씀을 마음에 새겼던 신리 교우들은 믿음 때문에 죽었고, 그로 인해 구원을 얻었으며, 후손들로부터 영원히 추앙받고 있다. 신리 성지 가운데 다블뤼 주교관은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던 다블뤼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라도 강경 나바위에 첫걸음을 내디딘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머물던 장소이다. 다블뤼 주교는 낮에는 한국천주교회사(달레)를 위한 비망록, 한국순교사를 위한 비망기, '한불사전' 등을 저술했고, 밤에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고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쓰여진 다블뤼 비망기와 수집자료는 한국의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국천주교회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대동맥이 됐다.

◇ 병인박해 때 교우촌 완전히 파괴돼

"많은 사람들이 내(다블뤼)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젖먹이가 딸린 여인, 노인, 처녀들이 3일 6일 또는 8일까지 걸리는 길을 걸어서 성사의 은혜를 받으러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혹심한 추위와 산을 뒤덮은 눈을 무릅쓰고 걸어왔습니다. 왔을 때는 기진맥진해 있었고, 발에서는 피가 났지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나의 초막에 신자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가끔은 아주 늦게까지 계속됩니다."(다블뤼 비망기 중에서)

다블뤼 주교가 머물면서 성사를 주고, 집필하던 주교관은 원래 이 지역 유지였던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였다. 다블뤼 주교, 다블뤼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 조선 포교를 위해 파견된 오메뜨르 신부, 위앵 신부가 주교관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병인박해 때 밀고에 의해 체포, 1866년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 성지에서 다같이 순교했다. 손자선은 다블뤼 주교와 같은 날(1866년 3월30일)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했다. 다블뤼 주교 외에 신리 거더리 황무실 응정리 옥금재에서 무려 60 여명의 병인박해 순교자가 나옴으로써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 천주교를 믿다가 몰살당한 마을

신리 교우촌의 슬픈 역사는 바람결에 전해져 내려왔다. 당시 다블뤼 주교가 쓴 많은 귀중 문서들이 1863년 다블뤼 주교 부재시 이웃집에 난 불이 옮겨 붙어 다 타 버렸다. 해방 전후 이 집은 마구잡이로 개축되면서 공소로 쓰였으나 1960년대 오기선 신부가 찍은 다블뤼 주교의 초가집 사진이 발견되면서 원형대로 복원해놓았다. 불에 탄 서까래, 주춧돌, "천주강생 1815년..."이라고 적혀있는 대들보를 올려다보면 작은 기적과 신묘한 힘을 느낀다. 이처럼 신리를 천주교를 믿다가 몰살당한 마을이다. 넓고 광활한 내포평야에서 충분하게 생산되는 쌀과 보리로 풍요롭게 살던 신리 마을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는 바람에 풍비박산이 났다. 끔찍한 피의 순교사는 세월과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리는 손씨 집성촌이었는데 천주교를 믿다가 몰살당한 마을이였시유." "그 천주교 하던 사람의 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이 나왔시유." 이런 얘기들이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들의 귀에 들어갔고, 수녀들의 보고서에 의해 본격 개발됐다. 그 이전, 다블뤼 주교관 뒤뜰에 성모상과 한솔 이효상 선생이 쓴 순교비가 들어섰다. 신리성지와 인접해있는 신촌초등학교는 십여명의 사제가 배출된 성소 못자리이다. 일상에 젖어 나태해졌던 마음을 씻고, 영적인 힘을 얻고 싶다면 신리를 찾아보라.

글 최미화 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 정우용 기자 vin@msnet.co.kr

도움 마백락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 / 대구관덕정 순교기념관 발바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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