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17살에 우리 집으로 시집 오셨다. 그때 할아버지는 15살이었다. 할아버지가 17살에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19살의 청상과부가 되시어 구한말, 왜정시대, 광복 조국의 감격을 다 겪으면서 힘들게 사셨다. 한 번도 보릿고개를 면해보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사시다가 1958년, 74세에 돌아가셨다. 그는 상주의 고성 이 씨로 황희 정승의 외손이셨다. 할아버지기 빨리 돌아가시니 손이 없어서 조카인 나의 아버지를 양지하셨다. 나의 종조할머니가 할머니가 되셨다.
할머니께서는 성품이 아주 온화하시고 자상하셨다. 내 위의 3남매가 당시 의료시설이 거의 없던 시대에 태어나 홍역으로 다 죽게 되자 할머니는 팔자가 험한 나 때문에 손자가 다 죽었다고 목을 매어 몇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어떻게든지 붙잡으려고 가진 애를 다 쓰셨다. 내가 집에 있으면 개 짖는 소리, 마을 아이들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잘 놀라고 잠도 못 잔다고 아침만 드시면 음식과 앉을 자리를 가지고 나를 업고 조용한 뒷산에서 종일 계시다가 해질 무렵 집으로 내려 오셨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으나 할머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대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손을 이으려는 할머니의 집념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주 신 씨, 외조께서는 선산, 상주를 비롯하여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알려진 대학자이셨다. 휘자가 장협(章協)공이시다. 왜정 말기인 1945년 1월 29일 거행된 장례식에서 제자들이 상복을 입고 정중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외조께서는 당나귀를 타고 우리 집에 종종 오셨는데 나의 이름 '演哲(연철)'을 작명해 주셨다. 선고께서는 농사를 하시면서도 낭만적이었으나 어머니는 매사에 철저했다. 가정 경제는 어머니께서 운영하시고, 농사일. 베 짜는 일, 가을에는 밤늦게까지 감 깎는 일, 12Km나 떨어진 학교에 걸어서 통학하는 나 때문에 새벽밥을 지어야 하는 일, 혹시 일어날 시간을 놓칠까봐 밤을 새우기도 했다.
어머니는 머리가 아주 명석하셨다. 주판이나 필기도구 없이 손가락으로 계산을 다 해내셨다. 그리고 평소에 천자문을 낱자로 다 외울 뿐 아니라 문장으로 天地玄黃(천지현황)부터 제일 끝의 焉哉乎也(언재호야)까지 다 외우셨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시조부터 할아버지 내외분 산소까지 그 위치를 다 아시며, 제향(祭享)도 하나 소홀함이 없이 직접 다 모셨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정신도 몸도 건강하셔서 우리 가족들은 106, 7세까지는 거뜬하게 사실 줄 알았는데 99세에 돌아가셨다.
우리가 건강하시다고 너무 소홀했다. 보행이 조금 불편해서 평소 가시던 들에 좋은 휠체어로 모시고 싶었는데, 너무 방심한 것이 큰 불효가 되었다. 휠체어를 사려고 몇 군데 돌아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차일피일 미룬 것이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아버지께도 불효막심했는데 어머니께도 또 효도를 다하지 못하다니, 미련한 내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휠체어를 밀어드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는데. 그동안 고생하셨던 일들, 그래서 자식들과 후손이 건전하게 살아왔다는 고마움과, 어머니 말씀대로 욕먹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꼭 드리고 싶었는데 풍수지탄(風樹之嘆)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 이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눈물로 명복을 비옵니다."
김연철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