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시험실 풍경

입력 2006-10-24 07:27:53

종이 울렸다. 교사는 짧고 무표정하게 '시험시작'을 알린다. 시험 준비로 들썩거리던 교실은 일시에 먼지처럼 가라앉는다. 앞에서 뒤로 돌려지는 시험지에는 지난 몇 주간의 학생들의 초조와 번민과 불면의 씨앗들이 무겁게 인쇄되어 있다.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들의 표정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교실은 백지장 같은 정적에 무겁게 휩싸인다. 이때, 교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째깍, 필요 이상으로 커진다. 시험종료 40분전.

교사는 교실 구석구석에 찐득하게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의혹의 먼지들을 감독자의 냉랭한 시선으로 세심하게 훔친다. 평소 교사의 얼굴에 따뜻하게 비치던 자애롭고 웃음기 가득하던 표정은 뜨거운 시험장의 열기 속에서 증발된다. 장밋빛 미래를 담보하는 '점수'를 경쟁적으로 얻으려는 학생들의 몸짓들과 그것을 차가운 시선으로 감독해야만 하는 교사에 의해 급속하게 냉각되어가는 교실 풍경은 삭막하다. 시험 종료 30분전.

사회적 진출과 성공에 필요 이상으로 학력/학벌의 무게가 비대한 우리 사회에서 눈밝은 철학적 안목 없이 갈짓자 정책으로만 일관하는 우리 교육정책의 어수선함은 어린 학생들에게 무한경쟁이라는 각박함의 무게로 고스란히 짐지워진다. 그 속에서 경쟁은 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게다가 현재 고1부터 적용되고 있는 새로운 교육과정은, 내신이라는 일상적 경쟁의 비중을 더 높여놓았다. 내신의 중요성은 강박증처럼 학생들의 일상을 가위누른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경쟁의 치열함은 시험기간이 되면 극한으로 증폭된다. 시험기간 내내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재워도 재워도 잠들지 않는 부정행위의, 그 어린 아기같은 칭얼거림을, 학생들은 양심의 젖을 물려 잠재워야한다. 시험 종료 20분전.

삶의 난제(難題)들을 끌어안고, 곁눈질 한번없이 정직한 표정으로 시험지와 대면하는 학생들의 표정 하나 하나가 교사는 대견하고 고맙다. 이 시점에서 학생들을 쳐다보던 감독자로서의 교사의 차가운 시선은, 교육자적 애정과 연민의 따스한 온기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그 따스한 시선으로 보면,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의 얼굴은 교사의 학창시절 모습 그대로다. 순간 교실은 교사의 과거 학창시절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된다. 교사는 교실의 학생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불면의 밤을 지새면서 꿈을 키우던 푸르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꼭 빼닮은 저 학생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감독/감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따뜻한 시선으로 믿고 어루만져주어야 할 존재가 아닐까? 모든 교육활동들을 '점수'로 수치화시키면서 무한경쟁의 일상으로 냉각되어가는 교육현실이기에 학생들과 그들의 꿈을 따뜻하게 품어줄 교사의 더운 가슴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시험종료 10분전.

교사는 지금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이 학생들이 아니라 그것을 감독하는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교실의 풍경 안에서, 스스로 교사로서의 가치와 열정을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평소 책읽기와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시인(詩人)이 꿈이라는 한설이가, 시험을 끝내고 창밖을 내다본다. 교사도 내다본다. 마른 풀냄새를 풍기며,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따뜻하다.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던 한설이와 교사의 눈이, 순간 마주친다. 따뜻하다. 종이 울린다.

김상묵(포항제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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