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큰 범인·뻥뚫린 치안…PB센터 보안체계 부재

입력 2006-10-22 08:23:50

경찰 "경찰의날 행사당일 사건발생 오비이락"

20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국민은행 강남PB(프라이빗뱅킹)센터에서 일어난 은행 권총강도 사건은 보기 드물게 치밀하고 대담한 범행 수법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다.

이번 범행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문적인 수법과 대담성 외에도 은행의 너무도 허술한 보안 의식과 경비 체계, 경찰 치안 공백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상식 뒤엎은 범행 수법 = 이번 사건이 무엇보다 충격적인 이유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시중은행에서 단 한 명의 범인이 대담무쌍한 절도 행각을 벌였다는 점이다.

경찰 관계자는 22일 "보통 은행강도는 최소 2-3명이 공모,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은행에서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간을 골라 직원을 위협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번 사건처럼 백주 대낮에 대로변에서 저질러진 은행강도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반 고객이 이용하는 일선 은행창구가 아닌 부유층 고객의 재산을 전담 관리하는 PB센터를 노려 허를 찌른 것이다.

PB센터란 고액 자산가 등 주로 부유층을 대상으로 종합 재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이번 사건처럼 범죄자가 태연하게 자산 관리 상담을 받는 척 하다 강도로 돌변하는 것은 전례가 거의 없다.

범인은 현금 1억500만원을 받아낸 뒤 은행을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아무런 반항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범행에 이용한 권총을 가방에 넣은 상태였지만 지점장, 남자 직원에게서 현관 안내까지 받았다.

범인은 ▲손님이 적은 마감시간을 택한 점 ▲상담시 밀폐된 공간에 2명만 남게 된다는 것을 노렸다는 점 등으로 미뤄 PB센터 사정을 꿰뚫고 있거나 철저히 사전 답사했을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 PB센터 '보안 불감증' = 수억원 이상의 자산가를 고객으로 하는 PB센터는 입구가 항상 잠겨있어 아무나 접근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안에만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범인이 고액 자산가로 위장하면 상담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지점장 등 은행 고위 관계자와 단 둘이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손쉽게 얻는다.

이런데도 상담실에는 비상벨 하나 없어 은행 직원은 위협에 무방비 상태가 되며 위험을 무릅쓰고 대항하더라도 센터 내부에 청원경찰이 없어 인명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이 발생한 역삼동 국민은행 강남PB센터는 국민은행 기업금융지점과 나란히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청원경찰은 국민은행 강남역지점이 있는 1층에 단 한 명만 배치돼 있었다.

시중은행의 한 직원은 "PB센터는 금고에 보유한 현금이 많지 않아 아무래도 보안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른 은행의 PB센터에도 청원경찰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사건 해결과 고객 안전은 뒤로 한 채 이익에만 치중하는 은행의 자세는 문제로 부각됐다.

이번 사건에서 지점장 황모(48)씨와 국민은행은 범인이 현장을 떠난 시각보다 1시간여 늦은 오후 6시6분께야 비로소 경찰에 신고, 범인 도주를 방조해 버린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찰은 "지점장이 가족에게 해를 끼치겠다는 범인의 협박 때문에 신고를 늦게 했다고 밝혔지만 본점에 보고하느라 신고가 지연됐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추석 등 명절 때 경찰 인력을 배치해주려고 해도 은행들은 오히려 고객들한테 불편을 끼친다며 싫어한다. 사실 은행은 보험을 들어놨으니 웬만하면 사건을 숨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 치안도 '구멍' = 은행의 대응이 워낙 늦었지만 경찰의 치안력 부재가 새삼 도마에 올랐다.

파출소 중심의 옛 방범조직이 지구대 체계로 변경된 2003년(10월15일)을 기준으로 '112신고 후 5분이내 현장 도착률'을 비교해보면 현행 방범 체계의 문제점을 엿볼 수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 경찰의 '5분이내 현장 도착률'은 2001년 92.8%, 2002년 94.1%로 90%를 넘었으나 지구대 체계가 도입된 이후 2003년 85.1%, 2004년 80.12%, 2005년 81.87%로 크게 떨어졌으며 올해 상반기(1~6월)도 79.16%에 머물렀다.

강도 발생 사실이 즉시 신고됐다고 해도 범인을 곧바로 체포했을 가능성이 낮아진 셈이다.

서울 지역의 경우 112신고 후 현장에서 검거된 피의자 수가 2002년 9만6천696명, 2003년 7만8천317명, 2004년 6만117명, 2005년 5만8천199명으로 하락 추세다.

이번 사건이 '경찰의 날' 하루 전날 오후 발생했다는 부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의 날이 토요일이어서 전날인 20일 기념행사를 치른 뒤 오후에는 필수요원만 남겨 두고 사실상 휴일 체제로 들어갔다.

범인이 은행 사정뿐 아니라 경찰의 이런 관행까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 관계자는 그러나 "이번 사건과 경찰의 날 행사와는 직접적인 상관성이 없고 순찰차 도착시간에도 교통여건 변화 등 다양한 변수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단발 사건으로 경찰의 범죄대응 태세가 느슨해졌다고 예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