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가을 애(哀), 애(碍), 애(愛)

입력 2006-10-21 17:02:34

가을이라 스산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사색에 잠기는 무게 있는 기운이 대세를 이뤄야 하는데, 옷소매 둥둥 걷고 때늦은 모기사냥에 분주하다니…그래도 큰아버지 같은 은행나무 노란 잎이 분명 가을이라고 웅변을 한다.

낙엽지애(落葉之哀)-낙엽의 슬픔.

떨어진다는 것, 바람에 날리어 어느 낯선 곳에서 썩는다는 것, 그래서 그 나무에 내가 있었노라는 추억만을 남긴 채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 줄지어 떨어지는 단풍잎들이 빨간 눈물, 노란 눈물이 된다. 늦은 밤 붉은 가로등 아래 작은 나무의 낙엽들이 바람에 기대어 흐느낀다. 그해 여름 그렇게 기세등등, 윤기 가득한 푸르름이었건만 어디로 갔는가?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건만 막상 닥친 헤어짐을, 쏟아지는 눈물을 아아! 막을 길이 없구나.

영원지애(永遠之碍) -영원의 절벽.

그래도 떠남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나만은 다르다. 이 자리에서 영원히 그대들과 함께하리라. 나는 시간의 증인이다. 아니 시간 그 자체이다. 늙은 떨림의 슬픈 숨소리만 더해 가는데 퇴적암처럼 변해가는 집착은 방향이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을 가진 당신, 그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당신, 이런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당신이 바라보는 우리를 슬퍼 외면하게 한다. 그 절벽은 오직 당신의 것일 뿐이다.

과실지애(果實之愛)-열매의 부활

너에게 모두 주기로 하였다. 청춘의 한철 온 가슴으로 품었던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깔로 나를 질투하게 하였던 그 꽃잎 사이로 네가 있었던 게로구나. 나의 역사와 신화와 꿈을 모두 함께 보내마. 너는 나의 우주다. 나를 기억하고 추억할 필요 없다. 너를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네 속에 영원히 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는 너일 뿐이다.

새벽 나를 죽도록 괴롭힌 모기 한 마리가 하얀 벽지 위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다. 물린 발등 한 번 쳐다보고 모기 한 번 쳐다본다. 불룩한 배를 두드리는 녀석이 너무 얄밉다. 내 잠을 설치게 하고 저토록 행복하게 자다니. 말아 쥔 신문지를 치켜들었다. 잠깐, 녀석의 몸속에는 뜨거운 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럼 나의 낙엽? 열매? 좌우지간 가을이 가을다워야 가을이지. 모기야 나의 가을을 온전히 돌려다오.

황보 진호(하늘북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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