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진 지음/ 뿌리깊은나무 펴냄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은 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경주 최 부자처럼 500년이란 오랜 세월 변함없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서양의 최장수 부자가문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은 200년 동안 부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 뿐만 아니라 정권의 실세로 권력을 행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등 비도덕적이고 반윤리적인 행태를 보이며 결국 멸문되고 말았다.
하지만 경주 최 부잣집은 적정이윤 추구와 정당한 재산증식을 통해 부를 유지했다. 흉년기에는 절대 재산을 늘리지 않았고, 권력과 결탁해서 이권을 가로채는 일도 없었다. 나아가 마지막 부자 최준은 전 재산을 나라와 사회에 스스로 바쳐 부자가문의 종지부를 찍었다.
어디 그뿐인가. 경주 최 부자들처럼 대대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을 위해, 사회봉사를 위해 온몸과 마음과 전 재산을 다 바치며 살다 간 부자는 찾기 힘들 것이다. 최 부자는 부자이면서도 자신들은 철저하게 근검절약을 실천했고, 투철한 사회봉사 정신으로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썼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을 위해, 일제 때는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사방 1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빈민구제에 앞장섰고, 노비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 노비가 도망가지 않는 집으로도 소문이 났다.
그래서 활빈당도 최 부잣집만큼은 공격하지 않았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리 없이 실천한 산 증표인 셈이다. 이 책은 한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인 경주 최 부잣집이 500년 부를 유지한 독특한 경영철학과 노하우 그리고 대를 잇는 부자교육과 가족문화를 밝히고 있다.
경주 최 부잣집에서는 육연(六然)과 가거십훈(家居十訓) 그리고 대대로 전해 오는 가훈의 형태로 엄격하게 후손교육을 실시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그들의 사람 사는 도리가 되었고, 부자경영의 노하우가 되었다.
부자에 걸맞은 신분을 유지하되 자제하고 절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고, 만 석 이상으로 재산을 모으지 말 것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시집온 며느리들에게 무명옷을 입게 한다든지 은비녀 이상의 패물은 가지고 오지 못하게 하도록 했다.
또 후손에 대한 재산분배도 당시의 장자 중심에서 벗어나 장자 이하의 아들과 딸 그리고 서자에게도 비율에 따라 골고루 분배했다. 특히 경영학적 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농사와 잠업에 힘쓸 뿐 아니라 당시 양반들이 취급하기 꺼려했던 해산물이나 한지 생산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 마름(농지 소유자의 집사)의 횡포가 심하다든가 지주가 소작료를 계속 올리는 등 소작제도가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도 최 부잣집은 직접경영과 병작제(竝作制)를 실시해 최 부자의 토지가 늘어날수록 수확량이 많아질수록 그에 비례해 소작농의 수입도 늘어나게 했다.
궁극적으로 항상 이웃에 대한 겸손과 나눔의 삶을 강조하며 온전하게 오래도록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참부자의 길을 자손 대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저자 최해진은 1997년 경주 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논문을 통해 처음으로 이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다.
또한 그동안의 자료수집과 현장취재를 바탕으로 경주 최 부잣집이 그동안 사실과 다르게 꾸며진 이야기와 몇몇 오류를 바로잡아 최 부자 이야기의 진본으로서 이 책을 내놓은 것이다.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는 신비한 비밀도 아니고, 한 가문에 대한 흥미 있는 전설로 취급되어서도 안 된다.
온 가족 구성원이 대대로 사람 사는 도리를 잘 지킨 살아 있는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로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참다운 부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살아 숨쉬는 우리나라 명문가의 역사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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