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 노닌다'는 뜻의 유학산 자락, 칠곡 가산면 학마을은 대구에서 30분밖에 걸리지않는다. 즐거운 가을 나들이에 나선 농촌체험단들이 겨우 서로 얼굴을 익힐 무렵 벌써 마을 표지판이 반긴다. 이런 어쩌나! 체험프로그램에 대해선 아직 설명도 못했는데.....
대구에서 지척거리에 있지만 높은 산 맑은 공기는 도심과 비교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풍년이 든 황금들녘에 마음은 절로 부자가 된 듯 하다.
때묻지않은 자연을 닮았을까. 마중 나온 김성태(57) 박득자(55·여) 이장 부부를 비롯한 주민들의 표정에서도 여유가 배어난다. "반갑습니다. 우리 가산면에는 이름에 '학(鶴)'이 들어가는 마을이 전체 19개 마을 중에서 9개나 됩니다. 마을사람들도 모두 학처럼 살려고 노력하지요."
마을 소개가 끝난 뒤 뒷산에서 주워온 도토리로 묵 만들기가 시작된다. 도토리 가루를 치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않다. 보다 못한 박득자 씨가 훈수를 둔다. "신랑 밉다는 생각하면서 해봐. 그냥 팔에 힘이 들어가잖아. 힘껏 주물러야 묵이 제대로 만들어지는 거야."
가마솥 안에서 묵이 익어가는 동안 이장댁 마당에선 정미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도시아이들은 나락이 쌀로 변하는 과정이 신기한 듯 떠날 줄을 모르고 연신 질문공세를 퍼붇는다. 안내를 맡은 장재호(45) 가산농협조합장과 황석재(45) 가산농민상담소장의 목소리도 신이 난 듯 하다.
저녁 노을을 따라 마을 산책에 나선다. 산바람이 꽤나 차갑지만 아이들의 손을 꼭 잡은 엄마아빠들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깨끗한 자연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모두의 가슴에 행복이 충만하다.
1시간의 산책이 식욕을 더했을까? 저녁식사로 나온 청국장과 삶은 돼지고기, 무농약 배추가 금세 동이 난다. 비록 사과상자 위에 비닐을 얹은 초라한(?) 밥상이지만 '왕후의 밥'이 부럽지않다.
깜깜한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 속으로 떠나는 신광진 의성 봉양정보고 교사의 별자리 안내는 모두를 동심으로 이끌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은 추억이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에 김치 한 조각, 알맞게 익은 구운 감자. 입과 마음은 마냥 즐겁고 정겨운 대화는 밤이 깊도록 이어진다.
일요일 아침, 마을축제가 열리는 옛 하판분교에 다시 모인 체험객들은 민박집 자랑에 한창이다. "우리 집은 미역국 주시던데 그 집은 뭐 드셨어요." "저희는 시래기국 먹었는데 할머니가 채소와 벌꿀까지 선물로 주셨어요." 사람 사는 정을 새삼 느낀 모양이다.
올해 3회째를 맞은 학마을축제는 마을 주민들이 손수 준비한다. 출연진도, 진행자도, 참가자도 모두 이웃이다. 단순한 주민단합대회도 아니다. 농촌의 정을 느끼려 찾아온 도시민들의 참여로 축제가 끝나면 자연스레 '주민'이 늘어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야말로 도시와 농촌을 묶는 사랑의 끈이다.
간밤에 고이 접은 알록달록 종이학과 풍선을 매달자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마을에선 도시체험객들에게 천막 하나를 내주고 경기에도 참가하란다. 물동이 이고 달리기, 줄당기기가 이어지면서 도시민과 마을주민은 너 나가 따로 없다.
각자 집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로 꾸민 허수아비들은 개성이 뚜렷하다. 도가연(37·여) 씨는 색동저고리로, 김영애(37·여) 씨는 멜빵바지로, 서미란(37·여) 씨는 빨간 목도리로 한껏 멋을 부린다. 논 가장자리에 심어놓은 허수아비들이 풍년을 지켜줘야 할텐데.....
사과 따기, 표고버섯 따기, 배추 솎기가 끝나자 양 손이 무겁다. "이 마을 사과가 정말 맛있네요. 배추도 농약을 한 번도 안 뿌렸다니 오늘 저녁에는 집에서 삼겹살 파티를 해야겠어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은 이내 단잠에 빠져든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에는 같은 소망이 있지않을까. '해마다 학마을에 학이 날아 들어 풍년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해주세요."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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