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앓는 손자 떠안은 장두옥 씨

입력 2006-10-18 08:45:09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밤, 명민(가명·12·중구 남산동)이는 전화기를 붙잡고 울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걸었던 전화였건만 전화기에선 없는 전화번호라는 소리만 들려왔기 때문. 잠에서 깬 할머니(장두옥·가명·65)도 이를 보고 말문이 막혔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손자더러 왜 엄마에게 전화했냐고 야단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명민이를 품에 안고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할머니네 집에는 약이 넘쳐난다. 작은 손자인 명주(6)는 심한 아토피증세에다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어 약을 입에 달고 산다. 천식에 먹는 약도 명주 것. 명민이 역시 예민해진 신경 탓에 배앓이를 자주 해 할머니가 약을 챙겨 먹인다.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당뇨 증세가 심한데다 관절염을 앓고 있어 약을 먹지 않으면 버텨내지 못한다.

지난날이 꿈만 같다는 할머니. 지난 10여 년은 할머니에게 악몽이었다. 평범했던 할머니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외아들이 결혼을 하면서부터.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순진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변했어요. 외박 한 번 안 해본 아이가 무엇에 홀렸는지 집에 안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다 만나는 여자가 있고 아들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합디다. 할말을 잃었어요."

신부가 되길 꿈꾸며 신학대에 다니던 아들이었기에 그런 상황이 더 기가 막혔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할머니는 한사코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아들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고 뱃속의 아기도 외면할 수 없었다. 둘만 행복하다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고집을 꺾었다. 바람과 달리 일이 꼬여만 갈 것이라는 것은 짐작치 못한 채....

스포츠센터에서 일을 시작한 아들이 출근한 뒤엔 며느리는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 뿐, 집안일엔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 할머니가 꾸짖고 달래 봐도 요지부동. 요란한 차림새의 친구들을 불러들여 담배를 피워 문 채 화투판을 벌이기도 했다. 아들 내외의 다툼은 잦아졌고 아들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어났다.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둘째 아이를 가지고서도 며느리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임신한 몸임에도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았다. 결국 핏덩이인 명주를 할머니에게 넘겨준 채 자취를 감춰버렸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겐 엄마가 필요하다며 만류했지만 허사였다.

"자신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할 생각이 없다더군요. 아무리 못난 어미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달랬는데 그 말에 화낼 기력조차 잃었습니다. 더구나 그 무렵 아들은 아는 이들과 벌인 사업에 실패해 가지고 있던 집마저 날려버렸어요. 집안 가재도구 곳곳에 압류딱지가 붙던 날을 잊을 수가 없네요."

할머니의 아들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심장 부근에 암세포가 있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할머니는 두 손자와 함께 월세방으로 옮겨 앉았다. 답답한 현실이 서글펐지만 코흘리개 손자들을 두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아는 이의 도움으로 아들을 시골 요양원에 보낸 뒤 두 손자를 돌봤다.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돼 매달 60여만 원을 지원받아도 약값으로만 절반 이상 빠져나가는 형편. 할머니에겐 공부 잘하고 착한 명민이가 큰 위안이 된다.

"두 손자를 위해선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요. 사랑에 많이 굶주린 아이들이에요. 그 흔한 과외 한 번 못 시켰지만 큰 아이는 공부도 곧잘 합니다.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다만 제가 얼마만큼 엄마가 주는 사랑을 대신 채워줄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제가 하루라도 더 버텨야 아이들이 살 길이 열리겠죠?"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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