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조선의 태평을 누리다/이한우 지음/해냄 펴냄
"성종은 '선비의 나라'가 만들어낸 조선 최고의 행운아였다."
세종이래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으로 평가되고 있는 조선의 9대 왕 성종을 향해 내뱉는 저자의 말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성종이 누구던가.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친경(親耕) 활동으로 농사에 모범을 보였으며 '동국여지승람' 등의 간행을 주도해 뛰어난 왕으로 600년간이나 성군으로 평가받아온 왕이 아니던가.
하지만 저자는 이런 평가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도 성종의 재위시기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였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태평성대는 성종의 작품이 아니라, 세종에서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선대가 이룩한 업적의 최고 절정을 누렸을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한명회를 비롯한 외부 세력의 시나리오에 의한 재위 과정은 그의 왕권 강화를 어렵게 했고, 7년이라는 긴 기간의 수렴청정과정을 거쳐 친정 체제에 돌입했지만 결국 정희대비, 인수대비, 인혜대비 등 3명의 대비와 한명회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학문에서는 성리학 애호가였기에 그에 따른 문운의 발전이 있었지만 성리학의 특성인 명분이라는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이란 현실적 과제를 외면한 채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저자는 여기에 한술 더 뜬다. 성종의 집권을 거친 후 조선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훈구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신진 세력 도입을 시도해 보지만 몸부림에 지나지 않고, 조선 최초의 폐비사건이 비극적인 연산의 운명을 만들었으며, 중종 이후 펼쳐지는 사림의 득세는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결국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
그렇다면 성종이 후대에 성군으로 기억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조선왕조가 성리학의 나라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리보다 명분을, 일하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을 중시한 조선은 문약한 '선비의 나라'였고, 성리학자들이 붓을 잡고 기록한 역사는 당연히 성종에게 후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문약'(文弱)의 전통이 한국인에게 여전히 선비에 대한, 나아가 성종에 대한 환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조선 군주의 리더십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가 '실록'이라는 명확하고 객관적인 토대 위에서 성종의 치적을 뒤쫓아 제기하는 반론은 성종의 집권 후반부에 대한 안타까움을 던지며 끝을 맺는다.
"이때(성종이 죽을 때) 성종의 나이 38세였다. 아쉬운 나이였다. 그러나 더 살았다고 하더라도 국왕으로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