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현명한 사람은 지금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극락을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은 지옥을 만든다. 국제 외교에서 벼랑 끝에 몰린 북한이 도발적으로 감행한 핵실험은 군대 보유와 전쟁을 금지한 일본의 평화헌법 9조 개정을 가속화시켜, 조만간 일본의 핵무장을 불러오고 한반도 안보를 무간지옥에 빠뜨릴 수 있음을 우려하면서 인류의 가장 향기로운 꽃인 붓다를 생각한다.
평화와 자비의 붓다, 정신의 발전이 물질적 행복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는 불교, 그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젊은 피를 바친 이차돈, 이차돈의 목이 날아가 떨어진 경주 계림 북쪽에 위치한 소금강산 백률사. 백률사로 향하는 242개 돌계단을 숨가쁘게 오르며, 부처님 자비를 구하기 위해 흰 피를 뿌린 이차돈이 핵 위기에 처한 한반도에 던져주는 메세지는 뭘까?
◇ 꽃다운 피를 대지에 뿌리다
신라 불교의 3대 성인은 불교를 처음 전해준 아도화상, 불교를 국교로 선포한 법흥왕 그리고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이차돈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첫 순교자 이차돈(506~527)은 신라불교를 위해 스무한 살 꽃다운 피를 무정(無情)한 대지에 뿌렸다. 좋은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보시라고 법화경은 가르치지만 사람이 가장 버리기 힘드는 것이 바로 신명(身命, 목숨)임을 이차돈이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이차돈은 "오늘 죽어 내일 대교(大敎=불교)가 행해진다면 불일(佛日=부처님 세상)이 오고, 성주(聖主=법흥왕)가 편안할 것."이라고 마음 먹었다.
◇ 인간의 발전을 강조한 불교 신봉
이차돈은 당시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해가던 군주 법흥왕과 당숙지간이었다. 궁궐에서 왕의 보필하던 내사사인이던 이차돈은 지거리에서 왕을 모셨기에 그 심기를 꿰뚫고 있었다. 율령을 선포하고 왕권을 강화해나가던 법흥왕이 불력에 의하여 국운의 번영을 꾀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대끼고 있었다. 토속 신앙에 젖은 귀족들은 자신을 천신과 같은 존재라고 믿었기에 불교를 배척했다. 젊은 혈기에 정의를 사랑하던 아름다운 신라청년 이차돈 역시 법흥왕과 같은 불교 신봉자였다. 깨달은 사람(覺者)을 지향하는 불교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정신적인 발전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 불교를 위한 자발적 순교자
조국인 신라땅에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던 이차돈이 왕에게 아룄다.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신하의 대절이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이라며, 자신이 천경림에 절을 짓기 시작하면 법을 어겼다고 해서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왕은 망설였으나 거듭되는 이차돈의 설득을 받았다. 어느날, 신라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천경림에 절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참에 이차돈이 왕명을 받들어 천경림에서 불사(佛事)를 시작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 법흥왕까지 위기에 몰리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콧대를 자랑하던 귀족들은 흥분하여 왕이 시킨 일이 아니냐고 따졌다. 여차직하면 이차돈 뿐 아니라 법흥왕까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할 지도 모를 위기였다. 법흥왕이 이차돈을 불렀다. 순교를 결심한 이차돈은 태연히 말했다. "천경림 불사는 부처님의 뜻을 따라 내가 시작했다. 부처님 법을 행하면 나라가 편안해지고 국운이 일 것인데, 무슨 죄가 되느냐."며 받아쳤다. 형을 받기 직전, 이차돈은 예언했다. "부처님이 계시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 참수 직후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다
왕명에 따라 주살(誅殺)된 이차돈의 목에서는 흰 피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잘린 머리는 저멀리 금강산(金剛山, 경주시 동천동 현재의 백률사 자리) 꼭대기로 날아가 떨어지는데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진동했다. 이 땅에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이차돈의 자비행이자 보시행이었다. 이차돈의 아름다운 순교와 그에 이어지는 기적을 접한 뒤 신라 귀족들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서기 527년의 일이었다. 불국토로 변한 신라는 발전을 거듭하며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해나가 삼국통일의 발판을 닦았다.
◇ 이차돈을 위한 원찰이 백률사
이차돈 순교 7년 뒤인 534년(법흥왕 21년)에 천경림에 신라최초의 사찰, 흥륜사가 세워졌다. 절이 완공되자 만년의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법공(法空)이라고 불렀다. 증축을 거듭한 흥륜사에는 금당(金堂, 544년)이 완성되어 십성(十聖)을 모셨는데, 순교자 이차돈도 함께 모셨다. 백률사는 이차돈을 위한 원찰이다. 오늘날 한반도 문화의 기저를 이룬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순교자 이차돈을 위하여 세운 백률사의 원래 이름은 자추사였다.
◇ 불교 기반으로 통일 국가 이뤄
언제부터인지 백률사로 불리기 시작한 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면 영화를 얻고 불도를 행하여 법리를 깨닫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차돈의 순교를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세우고자 했던 법흥왕의 정치공작이었다고 하는 하지만 부처는 모든 세속적인 정치를 초월하였다. 자신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정치적인 세력에 의지하지도 않았고 그의 가르침이 정치적인 세력을 얻는데에 쓰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인간본위의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반도 첫 통일국가를 이룩하는 쾌거를 이룬 것만은 사실이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사진 박노익 기자
취재동행 이정옥 위덕대교수(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
협조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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