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수달과 루미나리에

입력 2006-10-05 1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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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에 2천여 개의 축제를 소화해 내는 우리는 대단한 민족인가. 그러면서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해야 되는 오늘이다. 웬만한 도시는 그 나름의 축제를 갖고 있고 제법 알려진 시골마을에도 당연히 축제마당이 있다. 문제는 그 많은 축제가 과연 우리문화의 진정성과 잠재성을 발휘해 오늘의 우리들 가치와 얼마나 '열림과 소통'에 기여하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많은 이들은 축제의 질에 문제가 있음을 지금까지 누누이 지적해 왔다. 그러면서 하루빨리 정치적인 영향에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하다는 데도 입을 모은다. 그러기 위해서는 표준화된 축제 조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축제들 중 대부분은 아직도 나아가는 방향이 모호하고 해마다 열리기는 하지만 늘 일회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 속에 오늘도 열리고 있다. 혹독한 평가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사고 없이 치렀다는데 만족하고 만족한다.

지난 토요일 오후. 국제탈춤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안동의 한낮은 더웠다. 행사장으로 가는 사또행렬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잠시나마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자 일부 운전자들은 짜증을 낸다. "누구를 위한 행사요?" 한 운전자가 목청을 높인다. 명찰을 단 젊은 진행자가 자기는 부산에서 왔기 때문에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지 내용은 잘 모른다고 대답하며 얼른 자리를 피한다.

비슷한 시간대. 풍기 인삼축제는 고만고만하게 사람들로 붐볐지만 특이하다는 게 있을 리 없다. 관광객이 큼지막한 수삼 한 뿌리를 들고 "왜 이리 큰가, 혹 중국산 아닌가?" 묻는데 상인은 그 진위 여부를 말하지 않고 "축제니까 값이 싸고 몸에 엄청 좋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같은 시간대 봉화에서 열린 송이축제는 올해 송이가 없어 다른 지방 송이를 공수하느냐로 고민해야 했지만 축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대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루미나리에 불빛이 화려하고 휘황한 신천. 사람들은 설레고 플래시 섬광이 여기저기서 난리다. 컬러풀 페스티벌. 어떤 인사는 루미나리에 불빛이 희망의 불빛이라고 연설했다. 그런데 축제에서 만난 시민들은 그 누구도 희망의 불빛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반응이다. 화려한 희망은 원래 이뤄지기가 쉽지 않은 법.

하물며 루미나리에 불빛 바로 아래쪽에는 수달이 서식한다며 보호하자는 입간판이 버젓하게 서 있다. 수달은 신천의 귀하고 귀한 손님이지 않은가. 수달이 그 불빛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달도 희망을 보았을까. 아니면 수달 보호 입간판이 부끄러운 줄 알라며 더 어렵고 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숨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큰 축제를 위해 수달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발상. 그런 발상이 진정 더 문화적인 콘텐츠로 다양한 현대적 가치와 결부되는 일에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대박 터뜨릴 히트작에 연중 골머리를 앓고 있는 축제 관계자들에게 민첩성은 빠뜨릴 수 없는 요소다. 그러면 루미나리에는 민첩했는가. 우선 청계천을 떠올려 본다. 그렇다면 결코 민첩하다고는 할 수 없다. 최근 '부의 미래'를 발표한 앨빈 토플러는 "오늘날 민첩성은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전략이 없는 민첩성은 상황에 대한 조건반사에 불과하다…. 미래는 도착지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조언을 미리 들었다면 말이다.

사람을 끌어 모으고 그 숫자에 만족하는 축제도 축제인가. 외국인이 몇 명, 내국인 그 중에도 전라도에서 몇 명 왔다는 식의 숫자 놀이 축제도 축제인가. 그렇다. 분명 그런 것도 축제다. 축제는 사람들이 만들고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붐벼야 한다. 그러나 지금 신천에 살고 있다는 수달을 생각해 보면 마냥 붐비기에만 급급해야 될까. 마치 대중문화가 지나친 상업주의로 흐르다 보면 소비대중으로서의 대중은 오히려 피곤하고 권태롭고 소외감을 느끼는 그런 심리적 공허감이 오늘 신천의 수달 신세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김채한 논설위원 nam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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