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나자 1950년 6월 29일 문화예술인들도 구국에 동참하자며 결성된 단체가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였다. 6월 28일 간신히 한강을 건너 피신한 시인 서정주와 조지훈, 이한직은 29일 정부가 있는 대전에 도착, 이선근 국방부정훈국장의 승낙을 받고 종군문인단을 만든다. 이 때 붙인 이름이 '문총구국대'였다.
대원은 이들 외에, 박목월, 구상, 김윤성, 박화목, 서정태 시인과, 조흔파, 김송, 박용구 작가 등이었다. 함께한 대통령비서 김광섭 시인과 공보처차장 이헌구 평론가는 공무에 바빠 종군활동은 못했다. 가두방송과 벽보붙이기만 하던 문총구국대의 본격적인 활동은 정부가 대구로 피난 내려온 7월 16일 이후부터였다.
대구의 문총구국대는 이보다 앞선 7월5일에 태동했다. 처음 '구국대'가입에 관한 논의가 붉어지자 몇몇 시인들은 인민군의 거센 공세에 겁을 먹고 몸을 사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혹시 세상이 뒤집혀 보복을 받을까 봐 겁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가입하지 않는 것도 눈총을 받게 되자, 결성식 당일에야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더라고 한다. 여리고 겁 많은 일부 시인들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나 보다. 이런 곡절을 겪고 이효상 대장을 중심으로, 김사엽, 이윤수, 김진태, 최계복, 강영기, 김영달, 조상원, 백락종, 유기영, 이호우, 김동사, 최해룡, 박양균, 신동집 등이 연달아 '경북구국대'에 들었다.
7월18일 이후엔 피란 온 문인들이 합류하면서 '경북구국대'는 중앙본대의 확대강화 형태를 띠게 된다. 집회장소는 서문로 골목의 막걸리 집 '감나무집'이었다. 이 무렵 새로 입대한 피란문인은 시인 박두진, 장만영, 소설가 박계주, 박영준, 정비석, 최태응, 장덕조였다. 소설가 최정희와 김동리, 최인욱은 1.4후퇴 직후 합류하게 된다.
문총구국대원 이름으로 대구에서 발표된 첫 작품은 7월 19일 대구의 일간신문에 실린 시인 김윤성의 '젊은 가슴이여!'란 시와, 8월 14일 김광섭의 '승리의 노래', 서정주의 '총진격의 노래'였다. 두 가사는 이내 작곡가 이흥렬(李興烈)의 곡에 붙여져, 필승전의를 돋구는 활력소로 애창되었다. 특히 김광섭이 작사한 "바라보니 삼천리 화려한 강산/ 천만년을 지켜온 자유의 조국/ 우렁찬 진군으로 싸워 나가는/ 우리들은 민족의 동맥이로다."라는 경쾌하고 힘찬 노래는 전쟁기간 내내 애창된 노래중의 하나였다.
'구국대'는 8.15 5주년을 기념 삼아 '戰線詩帖'(전선시첩)이란 제목의 첫 작품집도 냈다. 4.6판 43쪽에 불과한 조잡한 전시판 시첩이었으나 구국의 기개만은 한껏 드높았다. 서정주의 '일선행 차중에서' 등 두 편, 조지훈의 '맹세' 등 세 편, 박목월의 '시장거리에서' 등 두 편, 구상의 '불덩이를 안고', 이효상의 '조국', 이윤수의 '전우', 이호우의 '지옥도 오히려', 김윤성의 '젊은 가슴이여!', 박화목의 '포문 열리다' 등의 시가 실렸다.
정부가 부산으로 떠나자 피란문인들도 대부분 따라내려 갔다. 이후 향토문인 중심의 '경북문총구국대'가 종군과 선무공작을 도맡게 된다. 이 때 대구에 남아 종군활동을 가장 많이 한 대원이 조지훈 시인이었다. 그러나 처자식은 물론, 아버지 조헌영의원 조차 서울에 남겨놓고(뒤에 납북) 단신 남하한 그는 하나밖에 없는 고교생 아우마저 귀향길에 인민군패잔병으로 오인 받아 즉결처분되어진, 기 막히는 가족수난사를 지닌 비운의 시인이었다.
" ...아버지가 안계시다/ 죽을까 염려하던 자식은 살아왔는데// 원수가 돌려준 아버지 세간/ 안경과 면도만이 돌아와 있다.// 어머니는 아직/ 짓밟힌 고향에서 소식이 없다.// 서른을 넘어서 비로소 깨달은/ 내 육친에의 사랑이 아랑곳없음이여.." 그가 수복직후에 쓴 시의 한 구절은 차라리 속으로 우는 피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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