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장미꽃의 진실

입력 2006-09-30 09:06:12

대구 달성동에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초에 대명동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수창초등학교에서 명덕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친구도 없이 낯선 상태로 풀죽어 며칠간을 지냈는데, 일주일인가 지나서 아주 예쁘장한 여자애가 서울에서 전학을 왔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어린 마음에도 어떤 두근거림이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마침 빈자리였던 내 옆자리를 지목하여 그 아이는 내 짝꿍이 되었다. 그 아이를 H라고 해두자. 지금 생각하면 그 아이는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윤초시의 증손녀 같았다.

해맑은 피부에 갸름한 얼굴과 사근사근한 서울 말씨. H로 인해 나는 학교 생활이 즐거웠다. H와 나는 일 년 동안 단 한 번도 다투지 않았다. 연필이나 지우개 같은 것도 기꺼이 나누어 썼다.

책상 위에 금을 그어 놓고 자신의 물건이 넘어가면 다투곤 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내 기억에는 우리는 금조차 그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다른 아이들은 H를 많이들 놀렸다. 서울말을 쓴다는 이유로 해서. '서울내기, 다마네기(양파의 일본말)' 어쩌고 하는 동요 비슷한 것을 부르면서 H를 단체로 괴롭혔다.

그런 놀림을 받는 H에게 나는 늘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어렸으니까. 그러다가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끔 길거리에서 우연히 H를 보면 서로 반가웠지만, 더 이상의 감정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아마 H와의 인연은 그 정도였을 것이다.

대건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친구들의 연애편지 대필을 단골로 도맡았다. 대가로 빵이나 자장면을 얻어먹기도 하고 무료 봉사를 해줄 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의 연애 사건을 누구보다 먼저 접했고, 때로는 그들의 고민도 듣고 충고도 해주곤 하였다.

B라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KT에서 부장인가 뭔가를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수줍음을 잘 타는 착실한 범생이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2학년 때부터 사랑의 열병에 빠져버렸다.

등하굣 길에 자주 만나는 여고생을 간절히 사랑하게 된 것인데,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물론 B도 그러한 심경을 나한테 털어놓은 적이 있었고, 나는 '무조건 대시하라'는 충고를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나의 충고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여전히 짝사랑의 그 잔인한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B와 나는 같이 교문을 나서는데, 우연히 H를 만난 것이었다.

나와 H는 인사 몇 마디 나누고 헤어졌는데, 멀찍이 떨어져 있던 B의 얼굴이 창백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일성(一聲), "바로 자다." B가 일 년 동안 짝사랑했던 대상이 바로 H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내가 주선을 해서 그 둘은 요즘말로 하면 소개팅 같은 것을 했지만, H는 B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비고사를 치기 두어 달 전에 B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 폐부종인가 뭔가 하는 병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심각한 것이었다.

남산동 어디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더니, B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하는 말, "H 얼굴만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나는 속으로 '문디 자슥, 죽기는 왜 죽어.'하면서도 다음날 남산여고 앞으로 달려가서 H를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병원으로 끌고 가 B의 병문안을 하게 했다.

H의 얼굴이 효험이 있었던지, B는 곧 건강을 회복했고 시험도 잘 쳤고, 대학도 잘 갔다. B는 이후에 '장미꽃이 나를 살렸다' 등의 말을 운운했기에, 차마 밝힐 수 없었지만. B야, 그때 H가 들고 갔던 빨간 장미꽃 다발은 사실은 내 돈 주고 내가 산 거다. 500원이었다. 그 금액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고등학생에게 500원은 상당한 거금이었다. B야, 언제 돌려줄래.

하응백(문학평론가·휴먼앤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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