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가을 운동회와 미제 껌

입력 2006-09-25 11:30:11

하늘대는 코스모스 꽃잎 위로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나는 가을 주말. 초등학교마다 가을 운동회가 한창이다. 문인 천관우는 新歲時記(신세시기) '가을'이란 글에서 어린 시절 가을운동회의 추억과 풍경을 이렇게 그렸다.

'코스모스가 우거져 피어 있는 운동장 가운데 높다란 장대를 세워 태극기를 달고, …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저마다 빨간 얼굴이 돼 응원하는 모습이 선하다. 농촌의 운동회는 어린이들의 큰 행사요, 온 面民(면민)의 큰 행사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면서 운동회 풍경도 달라졌다. 그저께 ㅅ초등학교 운동회의 풍경은 '新'세시기가 아니라 '新'新'세시기 같은 모습이었다. 로켓 공중 발사로 개막식을 알리고 준비운동은 호루라기 구령에 맞춘 체조 대신 미국 가수가 부르는 록 음악에 맞춰 탭 댄스로 대신했다.

한 가지 크게 변한 게 없다면 교장 선생님이나 내빈 어른들의 축사 정도일까.

마침 이날 ㅅ초등학교에는 신상철 대구시 교육감님이 초청돼 아이들에게 축사를 해주셨다. 교육감님이 이 학교 졸업생인 데다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인연 때문이었다. 이날 축사에서도 '건전한 육체에서 건전한 정신이 나온다'는 말씀이 담겼다.

건전한 정신은 튼튼한 육체에서 생겨나니까 몸을 강건하게 해야한다는 뜻으로 인용되는 이 말은 운동회 축사로는 적절한 名句(명구)고 옛 운동회의 추억 속에서도 자주 듣곤 했던 말이다.

그러나 운동회 얘기가 나온 김에 굳이 짚어보자면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란 말은 유베날리스라는 사람의 詩句(시구)에서 비롯됐다. 강건한 육체가 우선돼야 한다는 뜻으로 인용되지만 그의 풍자시 제10편을 보면 오히려 반대의 뜻에 가깝다.

원래는 '사람이 몸만 튼튼하면 무엇하겠는가. 그런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어 있을 때만 비로소 값어치 (육체건강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는 내용이다.

'국민의례 때도 흐트러짐 없이 잘하는 걸 보니 ㅅ학교 어린이들은 정신자세가 매우 바른 것 같다'는 칭찬을 덧붙인 이날 축사는 유베날리스의 詩意(시의)를 잘 감안한 축사가 된 셈이었는데 동석한 필자는 축사를 들으면서 문득 '미제 껌'이 떠올랐다. 55년 전 바로 운동회가 열리고 있는 ㅅ초교 운동장 한복판에 쳐져 있던 철조망이 기억나서였다.

철조망에는 흑인 미군 병사들이 총을 메고 보초를 섰다. 6'25전쟁이 나면서 학교가 미군 주둔 막사로 징발되고 우리는 천막 교실과 판자 가교사에서 공부했고 수업이 끝날 때마다 아이들은 철조망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미군 보초가 나눠주는 껌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빨리 뛰어간 녀석은 '쪼코렛' 같은 것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달리기가 굼뜬 녀석은 며칠 동안 껌을 못 씹어 볼 때도 있었다.

지금 뛰고 있는 저 아이들은 설마 이 운동장이 철조망이 쳐졌던 자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찮은 껌 하나 먼저 얻으려고 철조망까지 달리기 시합을 해야 했던 불과 반세기 전의 소설 같은 얘기도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국력이 쇠퇴하고 안보가 무너지면 외국 병사에게 껌 한 개도 얻어먹어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휴대전화'피자 시대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알게 할 것인가.

운동회 풍경은 세상 따라 바뀌었지만 그때 껌을 주던 미군병사들은 아직 남아있고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정권 또한 대를 이어 핵을 준비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변한 게 없다. 허우대는 멀쩡한 몸집 큰 어른들은 55년 전 좌우익으로 갈라 싸우다 전쟁을 치르고도 아직 좌파 우파에 도박 비리, 법조 갈등, 청문회 기 싸움으로 날을 샌다. 그들의 건전한 정신이 깃들지 않은 큰 몸집을 보노라면 또다시 저 아이들이 뛰고 노는 운동회 마당에 철조망이 쳐지고 점심 굶은 우리 아이들이 껌을 얻으러 달려가지나 않을까 속절없는 상념에 잠긴다.

김정길 명예주필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