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큰아버지의 봄

입력 2006-09-19 07:44:44

제 방에서 책을 읽던 딸아이가 쪼르르 뛰어나와 묻는다. "아빠, 5.18이 뭐야?", "그 때 광주에서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이럴 땐 난감하다.

신라나 고려 역사 혹은 그리스 신화 쯤을 읽다가 "아빠, 이땐 정말 이랬을까?" 하고 물으면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마 그랬을 걸."이라고 해도 좋고, "직접 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는데." 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 현대사에 얽힌 굴곡의 그늘을 물어오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줘야 하나.' 대답 대신 공연히 역정을 낸다. "넌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거냐?"

아이가 내미는 책은 동화책이다. '큰아버지의 봄', 5.18 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이라고 적혀 있다. 대충 읽어 보고 책 수준에 맞춰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며 책장을 넘긴다. 배경을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지인 진도 용장리로 잡은 것부터 작가의 고민이 엿보인다. 어린이들에게 5.18을 설명하기 위해선 어린이들의 현재 삶과 26년 전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엮어내는 치밀한 구성이 필수. 주인공인 열세 살 경록이와 서울에서 전학 온 덩치 크고 제멋대로인 친구와의 갈등 구조가 도입을 쉽게 해 준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 광주 정신병원에 입원한 큰아버지 면회를 가는 장면부터 은유는 사라진다. 80년 봄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5.18 당시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자괴감에 병든 큰아버지의 영혼으로 연결되는 이야기는 지극히 직설적이다. 광주의 의미를 새겨주는 오래된 표현도 빼놓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들은 먼저 간 사람들의 목숨을 이어서 사는 것인지도 몰라. 그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고 산다면 말이야.'

건성건성 읽으려던 책을 끝까지 움켜쥐고 놓지 못한 건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한 공감 때문일까. 어느 새 그 많은 죽음들을 기억의 끝단으로 밀쳐놓았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일까. 씻김굿을 통해 죽은 자의 영혼과 산 자의 정신이 어우러지는 대목에선 북받치는 마음을 참을 길 없다.

"아빠, 다 읽었으면 이제 얘기 좀 해 줘." 딸아이의 채근에 가까스로 책을 빠져나왔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갑갑하다. 두루뭉술한 대답보다 조만간 딸아이 손을 잡고 오랜만에 광주 5.18 묘역을 찾아가는 게 좋겠다 싶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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