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죽음, 죽이는 삶
낙(落)을 준비하는 엽(葉)들이 하나 둘, 노란 수의로 갈아입는다. 생명의 열정으로 뒤범벅이 되었던 사랑의 역사를 뒤로하고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스산한 바람 밑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사라진다는 것, 없어진다는 것, 끝이라는 것, 죽음이라는 것, 왠지 모를 절망이다. 알 수 없는 슬픔, 마르지 않는 괴로움의 원천이다. 삶을 가로막는 악마의 교활한 현현(顯顯)이다. 때를 알아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는 고백은 선택할 수 없는 일방적 굴복에 대한 자위일 뿐인 것을….
때때로 죽음을 직면할 뿐이다. 질병,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순간, 4차로 도로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는 고양이의 시체를 보는 순간, 잠시 죽음과 마주친다. 그리고 돌아간다. 살아 있구나. 나는 아… 따지고 보면 대단한 삶이란 게 있을 수 없다는 쓸쓸한 마음을 뒤에 두고. 죽음은 있지만 늘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운명이다.
실존적 삶의 본질은 '주어진 시작, 그러나 명확한 끝'이다. 삶의 괴로움의 절대 원인이다. 두 가지 노력으로 그것이 즐거움이 되길 원한다. 직선적 시간과 공간적 물질의 개념적 부정이 하나고, 끝을 확장적 변태의 시작으로 보는 전략이 나머지다. 이러한 시도는 일종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괴로움에 대한 자각은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일어난다. 문제는 삶의 괴로움이 항상 해결되며 동시에 그 위에서 다시 자란다는 데 있다. 이런 괴로움의 영속적 진화는 그 대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막을 방법이 없다.
괴로움의 숙주는 자기의식이다. 자아의식이다. 주요한 영양분은 괴로움의 일시적 해결과 다음 괴로움의 등장 사이에 현상적 만족이란 혈액을 통해 공급된다. 외면과 또 다른 집착이라는 대증요법의 한계는 명확하다. 숙주를 없애고 영양분의 공급을 중단하는 근본치료만이 해결책이다. 괴로움의 영속적 진화에 대응하는 자각의 영속성이 필요하다.
칙칙한 죽음을 순간적으로 직면하는 것, 염세적 도피처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그대로 삶을 죽여 가는 것이다. 하나 죽음의 상시적 자각은 방법이 된다. 늘 옆에 죽음을 두는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죽음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대상이 된다. 무엇으로 이 뜨거운 생명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허허 그것 참. 저 노란 잎새의 흔들림은 늘 함께해 온 죽음을 위로하는 생명의 춤이라는 것을….
황보 진호 하늘북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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