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 아들아, 딸아. 무슨 꿈꾸며 사니?

입력 2006-09-09 09:11:46

아들아, 딸아!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구나. 아침저녁 서늘한 기운도 기운이지만, 계절은 아무래도 가슴으로 먼저 오나보다. 이런 때 그냥 앉아 계절을 맞는다는 게 왠지 염치없어 가을 오는 길목으로 오늘은 차를 몰았다.

기왕이면 고향 쪽으로 방향을 잡아갔는데 가는 양쪽 들판 언저리엔 하마 가을이 널렸더라. 길 가장자리론 들꽃들이 피어 흔들리고, 저만치 익어가는 벼이삭들은 까닭 모르게 그리움 불러 오더라. 어린 시절, 아버진 저 같은 고향 들판을 하루해가 짧다고 헤매 다니며, 지금은 잊었지만 꿈을 키웠더니라.

아들아, 딸아.

너희들은 저 들판 속에 꿈이 있다는 것 모르지? 그걸 진작 일러주지 못한 아버지의 잘못이 큰 듯싶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자칫 그 속도 놓칠까 불안했던 나머지 너희들을 마구 밀어붙였던 일들 이제사 후회한다.

어쩌면 오늘도 그렇게 길들여져 늦은 시간에도 연구실에서 또는 직장에서 마냥 바쁘기만 할 모습들 생각하면 못내 안쓰럽구나. 저 같은 들판 마음에 담을 겨를이나 있겠나 어디.

애라, 내친 김에 계속 고향으로 달렸다. 고향이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잠시 차를 세우고, 길가 포장마차에서 칡차 한 잔을 마시며 잠시 생각했다. 누가 너희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더라.

우스갯소리로 OO산부인과라고 대답한다는 얘기도 있더라만, 아마 태어나고 자란 곳이 대구니 '대구'라고 대답할 것 같구나. 그래, 맞다. 그러나 도회란 본래 밝음보다 어둠이 많아 너희들이 보고 들은 것들도 어둡고 무거운 얘기들만 많았을 것 같아 그 또한 마음 가볍지 않구나.

저만치 읍내 전경이 내려다보이고 그 앞으로 여전히 냇물은 굽이져 흐르는데. 더불어 생각 또 많아지더라. 여름날엔 아예 그 냇물에서 살았단다. 벌거벗은 채 입술 파래질 때까지 세상은 몽땅 잊어버렸지.

더러는 참외 서리, 수박 서리하다 주인에게 들켜 혼나던 일마저 아버지 삶속엔 그대로 남아 이 각박한 세상 그나마 견뎌내는 힘이 된 것 아닌가 싶다. 겨울날도 그랬다. 내복인들 어디 든든히 입고 다녔나. 추워 벌벌 떨면서도 그 언 냇물 위를 얼음지치기로 하루해가 짧았지.

칡차 마시던 곳은 또 어떻고. 그곳은 어릴 적 아버지가 칡뿌리 캐며 종일을 헤매던 곳이었단다. 칡뿌리 질겅질겅 씹으며 돌아오던 저녁답은 노을도 참 고왔다는 생각 들더구나. 너희들과 그런 꿈 나눠 갖지 못한 아버지는 또 미안하다. 진정 미안하다.

냇가에 다시 차를 세웠다. 스쳐가는 얼굴들 참 많더라.

아들아, 딸아.

오늘처럼 이리 바삐 지나가는 시간 속에 너희들은 무슨 꿈꾸며 사니? 제대로 꿈이나 꾸고 사니?

읍내로 들어서니 모습들 꽤나 변해 좀은 낯설기도 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지워지지 않은 추억들 담긴 골목길이나 건물들 아직은 더러 남아 있어 가슴 뛰더구나. 아버지가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도 고쳐지긴 해도 옛 모습 지키고 있어, 기억을 불러내기엔 넉넉하더라.

자치기며 팽이 돌리기 하던 빈터는 사라졌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기억 속엔 그대로 꿈 되어 남아 있단다. 너희들 컴퓨터 게임보다 더 값진 꿈으로 오래 남을 거다. 구석진 토담집 울타리에 하마 가을꽃이 흔들리며 피고 있더라.

아버진 또 하나의 꿈 안고 그렇게 돌아왔다만....

아들아, 딸아! 너희들은 오늘, 무슨 꿈꾸며 사니?

송진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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