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여름이 물러갔다. 영원할 것만 같던 폭염이 언제였더노 싶다. 9월에 들어서자마자 바람결도, 하늘빛도 확연히 달라졌다. 바람은 감미롭고, 하늘은 며칠새 저만치 훌쩍 멀어졌다.
모레가 白露(백로)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절기. 물러날 것은 제때 물러나고, 올 것은 정확하게 찾아오는 天地(천지)의 운행이 새삼 놀라웁다.
평생을 왕성한 저작활동을 통해 사회 정의와 진실을 알리는 일에 매달려온 이 시대의 '지식인' 리영희 前(전) 한양대 교수가 "이제는 50년 지적 활동을 마감한다"고 밝혔다. 올해 77세. 수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집필활동이 어려워진 그는 "한 개인에게는 무한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 시간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테니스 스타 안드레 애거시도 엊그제 21년간 정든 코트에 작별을 고했다. 아직 30대 중반이지만 더 욕심을 낸다는 건 그간 쌓은 명예가 얼룩져도 좋다는 각오를 해야 할 나이다. 기립박수 속에 눈시울을 붉히며 그가 말했다. "여러분의 사랑은 코트에서뿐 아니라 인생에서 나를 이끌었다"고.
지인들과의 만남에서 가끔 이런 얘기가 오간다. "언제 사회활동을 접는 게 좋을까?" 어떤 이는 "60세가 좋겠어", 어떤 이는 "65세가 적당하겠지", 또 더러는 "평균 수명이 길어졌으니 70세 까진 괜찮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코끼리는 저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제 발로 코끼리 무덤으로 걸어간다고 한다. 2004년 말 인도양을 강타한 쓰나미 대재앙 때도 많은 들짐승들은 미리 도망쳤다 한다. 이런 豫知力(예지력)이 유독 만물의 靈長(영장)이라는 사람에겐 없다. 죽음이 코앞에 와 있건만 자신만큼은 죽음에서 면제된 존재인 양, 권력도 명성도 영원히 제것인 양, 기고만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한다. 물러날 때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남들이 좀 아쉬워할 바로 그때 떠나라는 것. 노학자와 스포츠 히어로의 퇴장을 보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시 '낙화' 중), 이 구절을 다시금 떠올린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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