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재산상속 풍경/이기담 지음/김영사 펴냄
'퇴계 이황도 처가 덕을 봤다?'
종통(宗通)을 최우선시하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그것도 대유학자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와 아내의 재산으로 덕을 봤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하랴'라는 속담에도 불구하고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 가문의 제사를 지냈고, 외가의 세거지인 밀양에서 성장한 김종직은 창녕 조씨와 혼인한 후에는 처가의 세거지인 금산 근처에 살았다는 말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금으로서는 놀랍기만 한 이 '새로운 전통의 풍경'을 대중 역사저술가인 저자 이기담 씨는 일종의 재산상속 문서인 '분재기'(分財記)에서 끄집어낸다. 실제로 조선의 재산상속기록을 뒤져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엎는 재미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외손과 친손의 구분이 없고 적서(嫡庶)의 차별은 있을지언정 딸, 아들의 차이는 별로 두지 않았다. 특히 재산 상속과 관련해서는 평등의 원칙이 적용됐다. 혼인한 딸에게도 장자와 똑같이, 어미 잃은 외손에게도 장손과 똑같이 재산을 나눠주도록 했던 것.
외가와 전처, 후처의 처가 및 자부(子婦)쪽의 가문들이 모두 조선시대 안동권을 대표했던 명문 사족이었던 퇴계는 당시의 풍습이 이러했기에 어머니와 아내, 며느리가 혼인할 때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평등하게 재산을 분배받은 덕택에 경제적 밑거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언적 등 일부 대유학자들의 유유자적한 생활 뒤에는 그들과 관계된 여성들이 받은 평등한 재산권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평등한 재산상속 관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문화를 낳기도 했다. '남귀여가혼'이라 하여 혼인할 때 처가에 들어가 살거나 처가 근처에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풍습도 그 한 가지. 장인은 장성한 아이를 데리고 분가를 하는 딸과 사위를 위해 자신의 집 근처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생활을 위한 노비와 토지도 줘 보냈다. 대체로 17세기 이전 사대부들이 낙향을 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할 때 반드시 처가 또는 외가를 택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남녀균등상속의 전통은 언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제사를 지내는 횟수가 늘어난 것과 관련이 깊다. 1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제사는 딸과 아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모셔 비용 부담이 덜했지만,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사의 횟수와 종류가 증가하게 되자 제사를 지내는 장자 중심의 가치관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8세기를 넘어서면서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게 되며 남녀균등상속의 전통은 깨지게 된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딸이 아들과 똑같은 상속분을 받게 된 것이 불과 30년도 안 된 것을 보면, 조상들이 우리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른다." 저자는 흔히 비인간적이고 냉정한 다툼을 연상케 하는 '재산'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여성의 평등권이라는 주제에서 조선시대의 정겨운 사람살이 풍경까지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