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출신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1912-1970)와, 충남 대천출신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1941-2003)는 생전에 교분이라곤 전혀 없던 사이였다. 활동시대, 출신지역, 등단시기, 문학장르 중 어느 것 하나 연줄이 닿지 않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 놀라운 '기연'의 예를 보여 숨은 화제가 되곤 했다.
1950년 4월초, 시인 이윤수(李潤守)가 대구 동성로에서 주업인 명금당(名金堂)시계포를 새로 개업하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때, 맨 처음 나타난 사람은 한 낯선 여성을 동반한 이호우였다. 두 사람이 막 의자에 앉을 즈음, 2, 3명의 '모기관' 청년들이 들이 닥쳐 권총을 겨누며, "손들어!"하고 소리쳤다. 그 길로 이호우는 '사지'로 끌려갔다. 그와 동행한 여성이 남로당 여성동맹원이었음으로, 이호우도 '간첩'이라는 혐의였다.
'타공시국'의 막바지였던 이 무렵은 오열(五列), 즉 '간첩'이란 혐의로 한번 끌려가면 여간해선 살아나오기 어려웠다. 더러 멀쩡한 사람도 심한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리는 살벌한 세상이었다. 한번 끌려가면 재판이고 뭐고 없이 후미진 산골짜기에서 처형된다는 끔직한 소문이 도는 준전시시국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호우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란 것이 주변사람들의 걱정이자 탄식이었다.
그러나 이호우는 모진 고문을 겪긴 했지만 두 달 뒤 가까스로 풀려났다. 문인들의 구명운동 덕이었다. 향토문인들의 연락을 받은 중앙문단의 조지훈(趙芝薰), 구상(具常)시인 등의 앞장선 탄원운동과, 당시 경무대 공보비서였던 김광섭(金珖燮)시인과 공보처차장이던 이헌구(李軒求)평론가 등 범 문단적인 노력 끝에 이승만대통령의 특명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이호우가 문인이 아니었든지, 문인이었어도 '무명'의 시인이었다든지, 혹은 그날 목격자가 없는 곳에서 끌려갔더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음이 분명했다. 뿐더러 달포만 늦게 풀려났거나, 한두 달만 뒤늦게 잡혀갔어도, 살아나긴 어려웠을 것이다. 뒤미처 6.25 광풍이 불어, 조그만 사상혐의나 모함만 받아도 처형되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호우의 '횡액사건'은 10 수년 뒤, 한국문단에 소설가 이문구(李文求)의 탄생에 기여하는 의외의 소득을 낳았다. 한국현대문인들 가운데 이문구의 경우처럼 비극적인 가족사도 흔치 않다.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 남로당 보령군책(保寧郡責)이 되었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던 이문구의 아버지는 6.25 후퇴 때 고향의 치안기관에 의해 처형되었다. 육사 2기로 입교했다가 위장병으로 자퇴, 집안일을 거들던 둘째형도 다른 사람들과 한 오랏줄에 엮인 채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18세였던 그의 셋째 형도 부친과의 연루혐의로 대천해수욕장의 겨울바닷물에 산채로 수장되는 참극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문구가 태어나기 전 일제에 강제 징집돼 도일했던 그의 맏형 역시 실종된 지 오래였다.
요행히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한 넷째아들 이문구는 순식간에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 중학시절 소설을 즐겨 읽던 그는 이호우 시인의 구사일생사건을 책에서 읽곤 자신도 문학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작가가 되면 동료문인들이 지켜봐줘, 개죽음만은 면할 수 있겠다는 자위본능에서였다. 문학 역시 소질이 전제되어야겠지만 집념으로 정진할 강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웬만큼 성공에 다가갈 수 있다. 이문구에겐 세속적인 연고가 없음에도 이호우시인의 수난일화가 기묘한 동기부여를 해 준 셈이었다. 생전에 이문구는 작가 김동리를 자신의 '문학적 사부'로 섬겨왔다. 그렇다면 '이호우사건'이야말로 그의 문학적 '모태'이거나 '요람'이었다고 해도 좋을까. 한때 '자유실천'을 위해 앞장서 싸웠음에도 무사했던 것, 역시 그가 이들 아버지세대 문인들로부터 받은 특별한 음덕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