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를 읽으면서 구보 씨는 무릎을 친다.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 네 가슴을 잃어버리기까지는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얻지 못하리. 800년이나 전에 서쪽 먼 나라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구보 씨는 지금 열어둔 창 밖에서 들려오는 우레가 가슴속으로 들이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세계는 감옥이고 우리는 갇힌 자들이다. 감옥 바닥에 굴을 파고 너 자신을 탈옥시켜라! 아무래도 새벽 소나기가 쏟아지려나 보다.
낮에 구보 씨는 동네 동사무소 이층에 있는 도서관엘 들렀다. 거기서 이 시집을 발견하고 빌려온 것이다. 자그마하지만 참한 도서관은 시원하게 냉방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열람석을 빼곡이 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의외로 조용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에어컨과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서너 살 먹은 아기가 뛰자 어머니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
구보 씨도 행여 소리가 크게 들릴까싶어 발 뒤끝을 들고 걸으며 책 구경을 시작했다. 개가식 서가에는 뿌리줄기처럼 책과 책들이 동시적이며 분산되는 연결성을 가지며 꽂혀 있었다. 보르헤스식 바벨의 도서관, 결코 '최종적인 책'을 찾지 못하게 하고 영영 책들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하고야 마는 미로의 도서관. 구보 씨는 웬 백일몽이냐며 고개를 젓는다.
히힛,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이가 혼자 웃는다. 그러면서도 눈을 책에서 떼지 않는다. 엘리스처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어쩌나. 옆에서 신문을 보던 어른이 빙그레 웃는다. 앞으로 저 아이는 참으로 현명하게 책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고 오래 행복할 것이다. 그때 구보 씨는 루미의 시집을 발견했다.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전설적인 어느 시인처럼 구보 씨도 한 일 년 책 속에 푹 파묻혀 있고 싶다고 늘 소원했다. 아버지의 소 판 돈을 들고 나와 예쁜 주모가 사는 주막집 방 한 칸을 빌려 책으로 가득 채우고 한 일 년 그것들을 읽고 나왔더니 시가 쓰여집디다. 남의 이야기하듯 허허 웃더라는 전설적인 어느 시인. 그의 초기 시는 먼 나라 시단의 전설이 되어 있다.
역시나 서가엔 목침 만한 두께인 그의 시전집이 뚜르르하니 꽂혀 있다. 그의 전설에는 사랑 안에서도 철저히 길을 잃었다는 풍문이 섞여 있어서인지 표지에 새겨진 캐리커처가 하회탈 같이 해학적으로 보인다. 예술가의 전설이란 무릇 각색에 가까운 수많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것이 많은지라 다 믿을 것은 못되지만 독서에 관한 한 불광불급(不狂不及)의 급수를 죄다 가지고 있지 않던가. 몇 만 권의 책을 읽었다는 누구처럼 또는 전설의 어느 시인처럼 되고 싶어 구보 씨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새벽녘 창 밖에선 가장 낮은 속삭임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래도 또 큰비가 오려나 보다. 구보 씨는 천천히 루미의 시집을 덮고 잠자리에 든다. 신비주의자 수피인 루미가 혹시나 꿈에 찾아오지 않을까 상상하며.
박미영 시인·대구작가콜로퀴엄사무국장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이철우 "안보·입법·행정 모두 경험한 유일 후보…감동 서사로 기적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