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역사의 달이다. 나라를 잃은 날(국치일)과 나라를 다시 얻은 날(광복절)이 달력에 한 주 건너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國恥日(국치일)과 光復節(광복절)에 대한 대접은 그 의미만큼이나 다르다.
광복절은 4대 국경일의 하나로 기념되지만 국치일은 날짜조차 기억하는 이 드물다. 국치일은 8월 29일이다. 1910년 이날 순종은 한일합방조약 전 8조를 공포했다. 이완용 등 매국노들은 이에 앞선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을 조인하고서도 이를 극비에 부치고 1주일의 시간을 보냈다. 어쨌든 이로부터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치일은 우리 국민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우리나라의 국치에 관여했던 당사국들은 어떤가. 8월 15일은 우리에게는 광복절이지만 일본에게는 패전일이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인정하고 싶건 않건 그들에게는 국치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날에 終戰紀念日(종전기념일)이라는 미사여구를 갖다 붙였다. 세계평화를 위해 종전 협정을 체결한 날이라는 의미다.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이날에 맞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공약하고 퇴임 한 달여를 앞두고 이를 실행에 옮긴 건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고이즈미는 이를 통해 이날을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일본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중국에도 국치일이 있다. 우리에게는 만주사변일로 알려진 9월 18일이다.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겨 놓은 날이다. 중국인들은 이날을 그냥 '9'18사변'으로 부른다. 중국인들은 이날이 되면 '국치를 잊지 말자(勿忘國恥)' '지난날을 잊지 않는 것으로 미래의 스승을 삼자(前事不忘 後事之師)'고 되새기며 행사를 갖는다. 중국인들은 이를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진다.
국치 96년이 지난 요즘 국민은 불안하다. 한반도 주변 정세는 구한말과 크게 달라진 바 없다. 아무리 경제가 성장했다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계열강들에 둘러싸여 있다. 청과 일, 러시아, 미국 등 선진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구한말이나 북 핵개발 및 미사일문제를 둘러싸고 6자회담 당사자들의 이해가 대립하는 오늘날이 별반 다를 바 없다. 해방 이후 전통적인 우방으로 자리매김을 해온 미국은 차치하고라도 중국, 일본, 러시아는 여전히 우리가 넘볼 수 없는 경제대국이자 군사강국이다.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대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해군력은 명실상부한 세계 3위로 평가받고 있다. 여전히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북에 대해서는 선제 공격 운운하고 있다.
중국 역시 군사력 세계 6위권이면서 군비 지출 세계 2위의 군사강국이다. 최근 들어서는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을 차근차근 진행시키고 있다.
국내 사정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구한말 개화파와 수구파가 갈려 정쟁을 일삼던 모습이나 보수와 진보 단체가 한날 동시에 서울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작금의 사태가 구한말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남북한이 아무리 한 민족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많은 국민은 북한이 현존하는 가장 큰 실질적 위협이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지만 우리가 북에 대해 군사적으로 전쟁 억지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북한은 핵으로 무장하고 있고 세계 3위권의 생화학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오죽하면 한때 이 나라 국방을 책임졌던 전 국방부 장관의 입에서 '지금은 을사보호조약 이후 대한제국이 넘어가는 때와 같은 초국가 비상시국'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경술국치의 원인을 들라 하면 누구나 일제의 침략을 탓하면서도 우리 내부의 요인을 드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어느 나라건 내부적으로 자체 붕괴 요인이 무르익었을 때 외침에 의해 국가 존망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를 역사에서 배운다. 멀리 로마제국도 그랬고 가까이 대한제국이 그랬다. 국민을 안심시키는 '자주'는 어떠한 명분이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우선이다. '국치일'을 치욕의 날로 생각해 잊을 것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자고 하는 까닭이다.
정창룡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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