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오성고등학교에 복직했던 1958년에는 자유당 일당 독재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사회와 민심이 극도로 혼미한 상태에 빠졌다. 공무원이나 군인이나 사회가 모두 부패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들고 나온 구호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국민들의 적극적 호응을 받았다. 선거 10일 전 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선거 결과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1960년 자유당은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필사적인 대책을 강구하였다. 3인조 9인조 세포 조직의 강화, 당원 배가 운동, 유관 기관단체의 특수 조직 강화 등을 획책하는 한편 야당 활동의 음성적 탄압을 공공연히 자행하였다.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던 1960년 2월 27일 수성천변에서 자유당의 선거 대강연회가 있어 대구 주변 시·군 주민을 강제 동원했다. 이튿날 2월 28일에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가 같은 장소에서 정견 발표회를 가지게 되자 많은 사람이 모일까 염려하여 자유당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하도록 지시했다.
경북고등학교에서는 3월 3일 실시할 고사를 2월 28일에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대구고등학교에서는 교내 운동회를 한다고 일요일에 등교하라고 했고, 대구상고, 대구공고, 심지어 여자 고등학교 및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각종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학년말 고사, 토끼 사냥, 체육 대회, 영화 감상 등을 이유로 일요일에 등교하게 될 학생들 중 특히 지각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은 이 문제를 '학생의 인권 문제'로 삼고 학원의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감행할 것을 결심했다.
27일은 자유당의 정치 강연을 듣도록 하기 위해 경상북도 산하 모든 공무원과 학생들을 동원하고, 각 기관과 학교에는 근무 시간과 수업을 단축시켜 강연에 참여토록 했다. 그러면서 28일은 일요일인데도 야당의 강연을 듣지 못하도록 학교에 등교하도록 한 처사는 의분에 찬 학생들에게는 도저히 참고 넘어갈 일이 못되었다. 28일 낮 12시 55분 경북고등학교에서는 학생 대표가 결의문을 낭독하고 반월당 네거리로 뛰쳐나가 구호를 외쳤다. 중앙로의 매일신문사 앞에서도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의 주장을 언론에 호소하였다. 대구고, 대구상고, 사대부고, 경북여고 등 학교도 가두시위와 교내 농성에 들어갔다.
나는 그때 정의감에 불타는 모습으로 가두로 뛰쳐나가 자유와 민주를 외치던 학생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2·28 민주운동은 3·15 마산의거의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4·19 혁명으로 이어져 나갔다. 즉 2·28 민주운동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이 된 것이다.
2·28 민주운동 기념사업회가 이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1962년 4월 19일에 명덕로터리에 기념탑을 세웠다가, 1990년 2월 28일 30주년 기념식 때 지금의 두류공원 자리로 옮겼다. 가끔 기회 있을 때마다 둘러보는 나의 감회는 너무나 깊고, 그 속에 대구 학생들의 숭고한 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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