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삶, 김연철] ②교직에 몸을 담다

입력 2006-08-17 07:26:20

4년간의 학창 생활은 꿈처럼 지나갔다. 사범대학 학생은 대부분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사가 부족한 사립학교에 출강을 많이 했다. 나는 4학년이 되자 곧장 오성고등학교에서 시간 강사를 했다. 학교에서는 국립 사대 수학과 출신을 구하기 힘든 처지여서 학급 담임까지 배정하며 우대했다.

시골 농촌에서 별 견문도 없이 대학에 들어왔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공부만 했다. 덕분에 4학년 재학 중에 고등학교 수학을 충분히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을 쌓았고 고등학교에서는 나를 두텁게 신뢰했다. 대학에서, 한번은 오용진 교수님의 수업 시간이었는데 출석을 확인하면서 내 이름을 김인철이라 부르지 않는가. 김연철(金演哲)의 연(演)자를 인으로 오인한 것이다. 나는 바로 항의를 했다.

"인철이 아니고 연철입니다."

교수님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도 없이 웃으시면서

"뭐 촌놈 이름, 인이나 연이나 같지 뭘 그래."

교실은 떠나갈 듯 웃음바다가 되었다. 교수님은 내가 두메산골 출신이면서도 어려운 수학과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고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신 것 같았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1950년대 국·공립 중·고등학교 교사 수급은 국립 사범대학 출신을 배정하였다. 경상남·북도는 경대 사대 졸업생이 거의 배정되었다. 사립학교는 본인의 희망과 재단의 승인으로 임용되었다. 나는 경상남도에 배정되었으나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대구시내 오성고등학교로 자원하여 가게 되었다. 그 학교는 4학년 때 1년 동안 시간 강사를 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재단에서는 아주 좋아했다. 1957년 4월에 부임하자, 초년생인 나에게 3학년 학급담임, 교과담임 그리고 교과 평가계 업무를 배정했다. 나는 내 이상을 마음껏 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열심히 가르치면서 교실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그러나 꿈같은 이런 시간도 잠시, 그동안 재학 중 연기되었던 징집영장이 나왔다. 5월은 학기 중간이어서 여름방학까지 연기를 하여 그해 7월 24일에 입대 휴직하였다. 학생들과 정이 들자 곧 이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사회 풍조는 대학을 졸업하였거나 가정이 넉넉한 집안에서는 돈과 배경을 동원하여 군을 면제 받거나 의가사 제대. 의병 제대 등으로 군을 기피해 왔다. 자유당 말기의 극심한 부패상이었다.

나는 사병 훈련을 마친 뒤 수성동에 있는 육군부관학교에 입교했다. 다행히 성적이 좋아 희망대로 부관부에 근무했다. 그때는 휴전이 되고 사회가 다소 안정이 되어 군에서 대민 지원 사업을 하게 되었다. 오성고등학교에서 수학과 지원 요청이 있어 거기에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단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만 영외 근무를 허용하였다.

1958년부터 중등교사도 교보(교원 단기 복무 제도) 혜택을 받게 되었다. 입대 15개월 만에 교보로 제대하여 그해 11월 1일 복직을 하게 되었다. 여시서부터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44년 4개월간 학교 현장에서 또 교육 전문직에서 봉직하게 되었다.

김연철 전 대구광역시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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