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 이수광 지음/ 일송북 펴냄
사림의 피바람을 몰고 온 김종직의 '조의제문'弔意祭文), 임금을 비웃었던 권필의 풍자시 '문임무숙삭과'(聞任茂叔削科), 임금에게 올린 왕비의 상소문 '정묘노난'(丁卯虜難), 너무 올곧아서 꺾인 젊은 개혁주의자 조광조의 옥중상소 '작시여세창왈'(作詩與世昌曰), 승정원에 내린 왕세자의 반성문 '왕세자하령정원'(王世子下令政院), 소설을 읽지 말라고 일갈했던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 천주교의 정당성과 유교의 허위를 질타했던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 동학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최시형의 '신원금폭소'(伸寃禁暴訴), 근대시의 탄생을 알렸던 이건창의 '전가추석'(田家秋夕), 그리고 고종황제의 '애통조서'(哀痛詔書)와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나는 야위어도 천하는 살찌리라'는 5백년 조선 사회를 뜨겁게 울렸던 최고의 문장을 모은 것이다. 발표 당시 조선 사회를 들끓게 했던 문장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되읽고 있다. 그동안 지난 역사를 통사적으로 기술하거나,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발행한 역사서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당대를 격랑하게 했던 문장을 통해서 그 문장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과, 그 문장으로 인해 파생된 역사적 사건들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역사서와는 다르다.
여기 수록된 문장들은 직필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려 했던 시대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상소문과 격문·윤음·묘지문·조서·포고문 등의 형식으로 피와 눈물이 배인 문장을 만들었고 시대와의 조화를 갈망했다.
선조들의 도도한 정신이 살아있는 글. 어떤 문장에는 준엄한 질책과 탄식이 담겨 있고, 어떤 문장에는 애끓는 울분과 호소가 담겨 있다. '조선 최고의 문장'이라는 화두에 골몰하며 이 책에서 저자가 선보이는 문장은 단지 수사가 뛰어나거나 문체가 아름다운 문장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글쓰기 중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이다. 선비들은 상소를 통해 임금의 정책과 당파를 비판했고, 나라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그로 인해 귀양을 가거나 참형에 처해지는 일도 잦았다.
조선시대의 직언과 직필로 인한 수난은 현대사의 필화사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의제문'을 남긴 김종직은 그로 인해 죽은 후에 다시 파헤쳐져 부관참시를 당하고, 제자들과 지인들까지 모두 죽거나 귀향을 가야할 만큼 참혹했다.
때론 삼대(三代)가 멸족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문장들이 돋보이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붓을 들었던 글쓴이의 정신이 응집돼 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우리라는 연대의식이 사라져가고 서사적 글쓰기도 힘을 잃어가는 오늘, 이 책은 역사적 사건과 문장의 탄생을 통해 글쓰기의 본질과 글을 쓰는 이의 자세를 일깨우고 있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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