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는 지극히 정치(政治) 지향적이고, 구룡포는 다분히 부(富) 지향적이며, 장기면은 학문지향적입니다."
포항 장기 출신으로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경북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박명재 전 중앙공무원 교육원장은 포항의 풍토와 저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다.
박 전 원장은 또 "흥해지역 청소년들의 소망은 국회의원 등 정치가가 되는 것"이라며 "당장만 해도 이상득 국회의원, 이명박 전 서울시장 등이 지역 인재들의 거울 역할을 한다."라고도 했다.
"구룡포에 가면 누가 몇 t짜리 배를 건조했고 어느 배가 얼마만큼의 어획고를 올려 돈을 벌었다는 게 화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동적이고 활기찬 흥해나 구룡포와 달리 장기는 같은 갯가 마을이면서도 유독 차분하고 여유가 있어 보이죠.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등 학자들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학자(學者) 지향적 내지 공직(公職) 지향적 문화와 전통이 뿌리내린 것 같습니다." 많은 포항 사람들이 이 같은 풀이에 동감하면서 '흥해=정치, 구룡포=경제, 장기=학문'이라는 등식은 이제 포항을 설명하는 대표 문구로 자리 잡았다.
◆학문과 학자의 산실
해안마을 치고 학문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곳은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갯가에 가면 부자 많다는 말은 많아도 학자 많다는 말을 듣기는 힘들다. 하지만 포항 장기는 다르다. 구룡포와 감포 사이, 20㎞ 남짓한 해안선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인데도 어촌다운 분위기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장기면에 들어서서 받는 첫 번째 느낌이다.
현직 교수만 줄잡아 50명 넘어
장기를 대표하는 것이 뭘까? 이 물음에 토박이로 양식장을 경영하는 유웅대(63) 씨와 정치망 어업을 하는 장종호(56) 씨는 입이라도 맞춘 듯 "장기읍성과 장기향교, 미역과 산딸기(복분자), 그리고 맑은 물과 정감있는 사람들의 정서"라고 했다.
홀몸노인과 결손가정 청소년들을 돌보며 묵묵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유 씨와 장 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게 사실이지만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지역의 전통"이라며 "이런 전통에 따라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이곳 출신의 학자나 고시 출신 고위 관료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양월리 장 씨 집안'으로 통하는 고 장상호 단국대 부총장과 동생 장상준 박사, 이들의 숙부로 대구대 문리대 학장을 역임한 장기동 박사, 그 선대인 장도수 전 장기중 교장 일가는 학자집안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성균관대 대학원장 이민홍 박사 등 현직 교수만 줄잡아 50명이 넘고 1급 이상 관료도 상당수다. 2천600가구 6천 명 남짓한 마을이 이 같은 인재풀을 지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을 뒤편 동악산과 그 위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는 장기읍성(사적 제386호), 읍성 안에 앉은 향교, 우암 선생을 기리는 죽림서원을 비롯한 금산·학삼서원 등 무려 8개나 되는 서원이 어우러져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면서 학자를 많이 배출한다는 게 이 마을 사람들의 한결같은 풀이다.
◆강과 바다가 모이는 곳, 날물치
구룡포에서 양포항 쪽으로 가다보면 신창1리에서 조그만 다리 하나를 건너게 된다. 동악산에서 내려오는 장기천의 민물과 동해 바닷물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이곳에 마을 시람들이 '미역바위' 또는 '날물치(생수암)'로 부르는 바위 두 개가 우뚝하니 자리 잡았다. 다리 위에서 손을 내밀면 닿을 것처럼 바로 앞에 선 바위는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민물-바닷물 만나 피서지 각광
미역바위는 이 바위에 붙어 자라는 미역의 질이 뛰어나 붙인 이름이고, 날물치는 맑은 물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장기중학교 교장을 퇴임하고 항토사학자로 활동 중인 금락두(66) 씨는 "동해안에서 이만큼 좋은 경치는 없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날물치에서 시작되는 신창리 해수욕장은 가족단위 피서지로 안성맞춤이다. 또 장기천을 타고 내려오는 물은 워낙 맑아 지금도 은어잡이가 한창인데 개울 바로 앞에서 YPC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진동(42) 양포교회 목사는 '물반 은어반'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포항 죽장면 출신으로 이곳에 들어와 목회활동을 하면서 생활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해 칭찬이 자자하다. 이런 사람들이 장기면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장기면의 힘, 양포항
장기면은 기북·신광·죽장면 등과 함께 포항에서 면세(面稅)가 가장 적은 곳이다. 하지만 100년 전인 1910년까지만 해도 전혀 달랐다. 당시는 장기군으로 구룡포와 감포, 양남, 양북 등을 한데모은 행정구역의 중심지였다. 쪼그라들어도 너무 많이 쪼그라들었다.
산딸기 '전국 최고 품질' 자랑
금낙두 씨는 "북쪽에서는 막강한 어업경제력을 앞세운 구룡포가 성장하고 서쪽은 해병대의 오천읍이, 남쪽은 신라문화를 앞세운 감포가 일취월장하면서 장기는 설 자리를 잃었다."고 풀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가 갈 곳은 동쪽의 바다(어업)뿐이지만 이마저 정부와 경북도, 포항시의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은 '장기면의 심장'이라는 양포항이 겨우 명맥만 잇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양포항에 가면 볼거리가 풍성하다. 큰 방파제 안에 들어선 항구에서 오전 5시 40분을 전후해 약 1시간 동안 열리는 활어 경매는 도시인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요즘은 아귀가 대풍을 이루면서 장 바닥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가격을 물어보면 항상 고가로만 구입했던 외지인들은 "이렇게 쌀 수도 있나?"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철은 지났지만 매년 5월 하순∼6월 중순쯤, 장기에 가면 전국 최고 품질의 산딸기를 맛볼 수도 있다.
장기면을 지나 남쪽은 신라의 고도, 경주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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