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져 내립니다." "만일 정부가 또다시 양보할 경우 아스팔트 위에서 목숨을 버리는 사태가 속출할 겁니다."
농촌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아니, 자포자기의 자조만 가득하다. 가뜩이나 도농 간 소득 격차 확대·농가부채 증가·인력 고령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농업이다. 쌀 시장 추가 개방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눈앞에 닥친 농민의 얼굴에선 이제 희망을 찾기 어렵다.
정부는 한·미 FTA 체결에 따른 일부 분야의 피해는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우리 농업도 개방화시대를 맞아 국제경쟁력을 갖춰야된다고 역설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쌀 한 톨, 사과 한 개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농민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강변한다. 하물며 상대가 세계 1위의 '슈퍼 농업대국'인 바에야.
◇손 놓은 과수산업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2004년, 한·미 FTA 체결 4년 뒤 한국의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액은 육류 7억 1천600만 달러, 과일 6억 9천만 달러 등 104억 달러가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연구기관들도 FTA로 인한 피해가 큰 품목으로 축산물·낙농제품·과일류를 꼽고 있다.
경북지역 농가의 위기감은 여기에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과수와 축산부문의 비중이 특히 높은 것. 사과(60%), 포도(46%), 복숭아(41%), 한우(24%)는 전국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닭고기(17.1%)는 2위, 돼지고기(15.2%)는 3위에 올라 있다.
한·미 주요 농산물의 가격 비교는 농민들의 'FTA 공포'를 실감나게 한다. 관세 철폐 후 미국산 사과의 평균 수입가격은 국산의 25%, 복숭아는 36%, 포도는 64.9%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축산물도 마찬가지다. 닭고기는 44%, 쇠고기는 45% 수준이다.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과일인 사과의 경우 미국산의 품질이 국산과 거의 차이가 없는데다 가격 경쟁력이 높아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북도 농업기술연구원 최성용(과수원예학) 박사는 "세계 2위의 생산비중을 차지하는 미국의 사과생산량은 2005년 현재 425만 4천t으로 우리나라의 10배에 가깝다."며 "최근 미국이 수출 및 미국 내 아시아계 소비자용으로 부사 품종의 재배면적을 늘리고 있는 것도 지나쳐선 안 될 부문"이라고 말했다.
과수농들의 걱정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4천여 평의 사과농사를 짓는 김주홍(43·봉화 봉성면 금봉리) 씨는 "미국산 사과의 생산비가 1㎏당 300원인데 비해 국내사과는 760원 수준"이라며 "수입 사과에 밀려 국산 사과는 설자리를 잃게 되고 협상과정에서 검역법이 완화되면 신종 병충해까지 함께 들어올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김 씨는 또 "경쟁력이 약한 소규모 과수농은 결국 작목을 전환하든지 폐농하게 돼 사회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2010년까지 예정돼 있는 FTA 기금지원사업이 마무리되기 전에 시장이 개방된다면 엄청난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눈앞에 닥친 축산 위기
지난 1월 13일 국내 축산농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실의에 빠졌다. 한·미 양국이 지난 2003년 이후 중단됐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합의한 것. 여러 문제로 아직 미국 쇠고기가 수입되고 있지는 않지만 수입 재개 합의는 FTA 협상 이전부터 미국 측이 한국에 요구했던 사항으로 전문가들은 한·미 FTA 추진을 위해 정부가 '지나친 양보'를 해준 것이 아니냐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한우 쇠고기는 2.6배에 이르는 국내외 가격 차이에도 불구, 품질 차이 등으로 국내 시장에서 40%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FTA로 관세 장벽이 없어질 경우 언제까지 국내시장을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3년 동안 한우를 사육 중인 최삼호(48) 경주축협 조합장은 "FTA 협상이 타결되면 국내 축산업 전 분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축산농들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양돈이나 양계는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해 변별력이 없지만 한우는 다르다."며 "특별법을 제정해 쇠고기 수입 관세를 한우·육우 농가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사용하고, 둔갑 판매를 막기위한 이력 추적 시스템 도입 등 소비자들을 위한 신뢰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미 FTA체결로 현재 국내에 수입되는 육류의 국가별 시장판도도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돼지고기는 칠레·벨기에 등이 주요 수입선이고 닭고기는 덴마크·태국에서 수입되고 있다. 쇠고기는 미국산의 수입 금지 이전인 2003년의 경우 미국이 75%를 차지했다.
최삼호 조합장은 "돼지고기는 수입수요의 가격 탄력성이 매우 높아 FTA 체결로 관세가 인하 또는 철폐될 경우 국내 양돈시장도 큰 피해가 예상된다."라며 "고품질 돼지고기 생산·유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책과 인프라 구축, 생산이력제 등의 종합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식량주권 멀어지나
최근 농림부는 오는 2015년이면 쌀 자급률이 90%로 낮아지는 등 전체적인 주식용 곡물 자급률이 54%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2004년에 비해 쌀은 96.5%에서 90% , 채소류는 94.3%에서 85%, 육류는 79.3%에서 73.0%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
국내외 가격차이가 3, 4배에 이르는 쌀은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어서 국내 농업 총생산액의 27.6%, 농업소득의 49.9%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쌀만큼은 지키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농민들은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경북 의성 단북면 '의로운쌀' 이병훈(41) 작목회장은 "벼랑 끝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쌀산업은 이제 위기라는 말도 안 통한다. 상당수 농민들은 자포자기한 상태."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씨는 이어 "지난해 정부가 다자간 협상을 통해 2015년부터 쌀시장 완전개방에 합의한 뒤 농민들의 희생으로 온 국민이 잘살 수 있다는 소리에 적은 위로금을 받고 모든 것을 양보했다."며 "정부는 지금이라도 협상을 일시 중단하고 국민여론을 수렴해 충분한 대책을 세운 뒤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지난 6일 대구 EXCO에서 열린 FTA토론회에서 "쌀값은 고도의 정치경제적, 사회적 의미를 갖는 사안으로 현재의 쌀값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농민들의 강제된 희생에 대한 '정치적 임금'"이라며 "미국산 쌀의 완전 개방은 국내 쌀 산업의 퇴출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상헌·이희대·마경대·김진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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