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 말의 안과 밖

입력 2006-07-18 07:17:32

7년 전, 서울에서 공부하던 딸아이가 결혼을 하겠다며 산적 같은 녀석을 대동하고 집에 나타났을 때, 녀석의 면목을 살피기보다는 우선 내 마음 한 귀퉁이가 우지직 무너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허둥대는 내 앞에 그 산적이 꿇어앉아 뭐라뭐라 조아리는데 무슨 말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내 곁이 아니라 그 산적 옆에 앉은 딸아이와의 거리가 천리만리 먼 듯 해 섭섭해지더군요. 그해 8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9월 초순에 딸아이가 그 산적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던 날 인천 비행장 출국게이트 앞에서, 인간의 말이라는 것이 마음을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저 사위 녀석의 손을 잡고 '우리 눈이나 한 번 맞추자.'면서 한참 동안 물끄러미, 정말 그냥 물끄러미 눈을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성에 의해서 추상적으로 분절되고, 언어에 의해서 개념화되기 이전의 그냥 원초적인 상태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이것이 더욱 완전한 의사소통의 형식이 되겠지요. 김기택 시인이 쓴 라는 시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몸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않는다.//수천만 년 말을 가두고/그저 끔뻑거리고만 있는…' 그렇지요. 눈물처럼 떨어질 듯 말 듯 그렁그렁 가슴에 담긴 마음이 몸밖으로 표출되는 언어의 통로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눈을 열고 마음의 물살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밖에 없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언어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우려되는 것은 진실성의 결여가 아닐까요? 국어교육에 힘입어 언어적 표현의 형식미는 상당히 정제되어 원숙미를 과시할 정도에 이르고 있지만, 터무니없는 사기와 과장으로 미화된 말들이 진실을 왜곡하고, 타인을 공략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심각한 언어공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머리의 언어를 배격하고 가슴의 언어를 옹호한 노자의 언어관을 되새겨 보고 이를 국어 교육의 중요한 내용으로 적극 수렴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봅니다.

얼마 전 딸을 얻은 미국의 사위가 전화로 '나중에 딸아이와 결혼하겠다는 녀석이 나타나면 반드시 장인어른이 비행장에서 자기에게 전해준 눈빛을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냥 웃음을 흘리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내가 눈으로 담아내려던 마음을 다 헤아리려면 자네, 아직 멀었느니라.'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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