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진의 대구이야기] (28)화가 김용준의 빗나간 선택

입력 2006-07-10 07:58:34

대구출신으로 6.25 때 북으로 간 유명화가로는 이쾌대(李快大)와 김용준(金瑢俊)이 있다. 해방공간에 활발한 좌익미술운동을 벌였던 이쾌대는 6.25 때 의용군으로 갔다가 포로가 된 후 포로교환 때 북행을 자청한 적극적인 좌경행동파였다. 반면에 김용준은 그 무렵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성향대로 좌익 심파(동정파)수준이었으나 6.25이후 붉은 서울에서 좌익의 조직적인 미술활동에 휩쓸린 나머지 9.28 때 막다른 선택으로 북으로 간 화가였다.

천석꾼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쾌대와는 달리, 1904년 생으로, 가난한 농사꾼의 장남이었던 김용준은 대구의 해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다.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2년 뒤 친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서울 중앙중학에 진학하면서 화가의 꿈을 펴 갈 수 있게 된다. 1921년 중학을 마치고 도일한 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 고학 끝에 1928년 졸업한다.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중앙중학의 미술교사가 되면서 안정된 화가의 길을 걷는 한편 수필가와 미술사가로서의 또 다른 숨은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김용준은 아호가 많았다. 선부(善夫), 금려(黔驢), 반야초당주(半夜草堂主), 근원(近園), 벽루(碧樓), 우산(牛山), 매정(梅丁)등 일곱 개나 되었다. 이 중 조선조의 대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를 사숙하며 닮아보고 싶다는 뜻에서 지은 '근원'을 즐겨 사용했다. 일제의 '조선미술전람회'에 반감을 가졌던 그는 1938년 이후 서양화보다 동양화에 몰두했으며, 해방 후 단원관련 논문을 수차 발표했을 정도로 단원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런 연구결과는 뒷날 북한에서 란 저서로 결실을 본 것으로 알려진다.

해방 후 문화계가 좌우로 갈려 요동칠 때도 김용준은 비교적 초연한 위치에 있었다. 1946년 2월 '조선미술가동맹'이 조직되고, 이어 조직된 '조선조형예술동맹'과 합쳐 '조선미술동맹'으로 개편되었으나 그의 이름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무렵 동국대학의 미술교수였던 그는 고향의 후배화가인 이인성(李仁星)과 이쾌대, 친구인 길진섭(吉鎭燮)이 '동맹'의 고위간부로 활약할 때도 무심한 자세였다. 그만큼 그는 기질적으로 '자유주의자'였다.

수려한 문장과 지적 해학으로 가득 찬 그의 수필집 '근원수필'의 발문에서 그의 사상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이제나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무엇보다 자유스런 심경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다. 남에게 해만을 끼치지 않을 테니 나를 자유스럽게 해 달라. 밤낮으로 기원하는 것이 이것이건만 이 조그만 자유조차 나에게 부여되어 있지 않다....."

그런 그가 전란 때 북을 택하고 만 것은 남한현실에 대한 염증과, 적화시기의 '부역행위'가 켕기었기 때문이었지 않았나는 추리를 감안하더라도 파격적인 결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월북 후 그는 조선미술가동맹의 중앙위원과 조선화분과위원장,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 등을 겸하면서 미술교수로 있었다. 이 때 '춤', '옥수수', '황금벌',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시며'등의 조선화(동양화)를 창작하며 비교적 안온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춤'은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민간무용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했다는 북한화단의 평가였다. 그러나 김용준으로선 여기까지가 북에서의 전성기이자 생의 끝자락이었다.

1967년의 어느 날 그는 평양의 한 아파트에서 63세를 일기로 자살했다고 한 고위 탈북자가 증언했다. '수령님의 초상화'가 실린 신문지를 오려내지 않은 채 파지에 끼워 넣어 넝마 수매소에 넘겼기 때문이란다. 무심코 한 행위였겠지만 '수령님'을 우상시하는 북으로선 중죄였다. 엄한 추궁과 비판에 못 견뎌 심약한 그는 그만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멋쟁이 신사였고, 자유분방한 지성인이었던 김용준이 애초 강압사회를 택한 것이 잘못인지 모르나 그의 마지막 선택치곤 너무도 어이없고 우화 같은, 강요된 죽음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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