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다. 땅이 작고 인구가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다.'(이준 열사)
몇 년 전 한 시민단체가 경북지역 도시 어린이와 농촌 어린이의 문화생활을 조사한 결과 격차가 2배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쌀시장 개방·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농촌의 시름이 깊어지면서 어쩌면 지금은 그 차이가 훨씬 더 벌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간 60주년을 맞아 도시 어린이들에게 농업과 농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독자 농촌체험-가자! 생명의 땅으로'를 진행하고 있는 매일신문사는 이번에 산골 어린이들을 초청했습니다. 사회·문화적 환경이 열악한 벽지 어린이들이 새로운 체험을 통해 우리 사회의 대들보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2박3일 도시체험을 따라가 봤습니다.
■산골 아이들, 수영복을 입다.
지난 6월 28일 오전 7시 30분 영양군 청기면사무소 앞. 청기면의 초등학생들이 모두 모였다. 전부라고 그래봤자 고작 35명. 대구시내 같으면 한 반 인원밖에 되지않지만 이나마도 입암초교 청일분교장, 일월초교 청기분교장·청북분교장 등 3개 분교 재학생을 모두 합친 숫자다.
모두 설레는 표정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는 3년에 한 번씩 4·5·6학년을 모아 수학여행을 간다. 저학년생들은 단체여행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덩치가 헤비급인 박민환(11)이도, 군데군데 이가 빠져 더 귀여운 장은영(8·여)이도, 키가 선생님만큼 큰 김은채(11·여)도 모두모두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영양교육청 하영진 교육장, 입암초교 하종현 교장, 일월초교 박규영 교장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한 지 20분. 버스에 익숙지 않은 산골아이들이라 그럴까. 아뿔싸! 이세한(8)이가 벌써 멀미로 실례를 하고 만다. 하지만 해프닝도 잠시. 버스 안은 금세 조잘조잘거리는 소리로 완전 시장판이다.
아이들이어서 금방 친해지는 것일까? 틀림없이 다른 학교 아이들인데도 전혀 스스럼없다. 그 궁금증은 이유숙(54) 교사가 풀어줬다. "워낙 학생 수가 적은 탓에 한 달에 한 번은 모두 한 학교에 모여 체육·토론수업을 합니다. 덕분에 교육효과도 높고 아이들도 친밀감을 느끼죠."
2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매일신문사. 이진협 상무이사의 안내로 편집국과 제작국·광고국·독자서비스국을 둘러보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반짝인다. "기자는 어떤 일을 하나요?" "컴퓨터 없을 땐 어떻게 신문 만들었어요?"
마감시간에 쫓기는 편집국을 뒤로하고 경북도청에 도착하자 퇴임을 며칠 앞둔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기념촬영을 마친 뒤 강당에서 애니메이션 '천마의 꿈'을 보는 동안 배꼽시계가 꼬르륵꼬르륵 신호를 보낸다.
'최고 인기메뉴' 자장면을 한 그릇씩 뚝딱 해치운 뒤 달려간 곳은 스파밸리(대구 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쉼없이 장난치던 아이들은 "떠드는 학생은 버스에 남는다."는 선생님의 엄포에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파도풀·유수풀·워터슬라이드 등 재미있는 물놀이에 시간은 아쉽게만 흘러가고 멀미 때문에 고생한 세한이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핀다.
대구교육과학연구원(원장 조춘현) 천체투영실에서는 탄성이 끊이지 않는다. 백조자리·거문고자리·전갈자리 등 플라네타륨(planetarium)을 통해 비친 별자리는 일월산 아래 고향 하늘보다 못하겠지만.
저녁 메뉴로 나온 돈가스는 산골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다. 나이프와 포크 잡는 법이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보다못한 최정은(27·여), 장선정(31·여) 교사가 나서서야 고민 끝.
숙소인 대구은행연수원에서 열린 경제교실은 새벽부터 뛰어다닌 탓에 모두 몸이 무겁다. 박성진(37) 과장의 재미있는 강의와 선물이 걸린 퀴즈가 겨우 졸음을 쫓는다.
■화랑의 기상을 가슴에 품다
이튿날 아침. 침대에서 처음 잔 아이들의 침대 낙상기, 베갯싸움 무용담을 반찬 삼아 아침을 먹고 경주로 체험무대를 옮긴다. 장맛비 대신 뙤약볕이 따가운 국립 경주박물관에는 벌써 김언자(59·여)·길정옥(53·여) 문화유산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안압지 유물관을 둘러본 뒤 찾은 불국사·석굴암에서 최지승(9·여)이는 반가운 얼굴과 만났다. 할아버지 최감(71·경주 암곡동) 씨가 손녀 마중을 나온 것. 지승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채 토함산을 뛰어다니면서도 경주에서 살자는 할아버지의 말씀에는 연방 도리질이다. "함께 놀 친구가 없어도 전 시골이 좋아요." 영락없는 시골아이다.
문무대왕릉 앞에서 잠시 쉬는 시간. 선생님의 설명은 아랑곳없이 아이들은 기념품 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선다. "원, 플라스틱 칼이 그렇게 좋으니." "놔두세요. 간만에 용돈 받았는데 뭐라도 하나 사고 싶겠죠."
한국수력원자력(주) 월성원자력본부를 거쳐 동해바다가 눈 아래 펼쳐지는 꼬불꼬불 바닷길을 따라가니 어느새 구룡포 포항청소년수련원. 더위에 지친 녀석들은 채 보일러를 틀기도 전에 냉수로 샤워를 끝내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은 마당에서 선생님과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너희가 희망이다
마지막 날 아침. 해돋이는 못 보았지만 오늘도 검푸른 동해바다는 햇빛에 반짝인다. 맑은 복어국으로 차린 아침식사가 별 인기가 없다. 전날 저녁 피자파티 후유증일 게다.
서둘러 짐을 꾸려 찾아간 호미곶 등대박물관에서는 전현정(29) 학예사의 안내로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코스는 '항해체험'. 키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모니터에는 야속하게도 '항로 이탈'이란 글자만 뜬다. "선생님예, 이거 고장난 거 아입니꺼."
드디어 마지막 체험장인 포스코(POSCO)다. 1200℃로 뜨겁게 달궈진 후판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동안 점점 더 얇아지는 장관에 마냥 신기한 얼굴들.
7번 국도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녀석들, 사흘 동안 떠들었으면 이제 지칠 때도 됐는데… 일월산 아기 노루도 저리 힘이 넘칠까?'
한아름 선물을 받아든 채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는 얼굴들엔 못내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가는 박혜미도, 인사도 없이 밭둑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영재·이영은·이혜리 3남매의 뒷모습에도.
"아이들아, 힘내렴. 너희들이 우리의 희망이란다. 너희 중에서 퓰리처상을 받는 명기자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노벨상에 빛나는 과학자도 나올 거라고 우린 믿는단다. 파이팅!"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도움 주신 분들
경북도·포항시·대구교육청·경북교육청·포항해양수산청·대구은행·포스코·한국수력원자력(주)·불국사·대구백화점·동아백화점·롯데백화점·E마트·스파밸리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