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경색 아내 지키는 김형진 씨의 사랑

입력 2006-07-05 09:27:33

김형진(38·서구 비산동) 씨는 일이 없을 때면 늘 아내 윤전균(31) 씨의 병상 옆을 지킨다. 행여 잠든 아내가 몸부림이라도 치면 조용히 이불을 덮어준다. 아내가 쓰러지기 전엔 이렇게 오래 함께 있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고개를 든다.

지난 4월초 윤 씨는 급성폐렴으로 응급실을 찾았다. 몸은 열로 달아올랐고 의식도 없었다. 오랜만에 아내를 만난 김 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게 아내를 떠나보내나 하는 마음에 속은 바싹 타들어갔다.

다행히 보름 만에 의식은 돌아왔다. 하지만 뇌경색으로 왼쪽 몸에 마비증세가 오는 바람에 혼자서는 움직이기조차 쉽지 않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이 됐다.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걸을 수도 없고 물건조차 움켜쥐기 힘들다.

김 씨가 아내를 만난 것은 10여 년 전. 둘은 지역 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보육사로 함께 근무하며 사랑을 싹틔웠다. 내성적이면서도 사람들에게 자상했던 아내는 김 씨 마음에 꼭 들었고 그는 '이 사람이다' 싶은 마음에 결혼을 서둘렀다.

지난 1996년, 월세방을 구해 신혼살림을 차렸다. 보육사 수입이 많지 않은 탓에 형편은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낮에는 복지시설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전문대에 다니며 사회복지 공부도 했다.

"둘 다 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려운 이들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형편이 여의치 않은데도 아내는 제가 공부하는 걸 말리지 않았어요. 누구보다 절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3년 전 뜻하지 않은 불행이 연이어 닥쳤다. 뱃속의 아이가 유산된데다 이로 인해 아내가 산후 우울증에 빠진 것. 우울증을 쉽게 극복하지 못한 채 정신이 흐려져 가는 아내를 김 씨 혼자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결국 두 딸 안나(10), 유나(9)와 함께 아내를 처가(경북 성주군)에 보내고 대구에 홀로 남았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무렵, 또 일이 터졌다. 노인복지시설을 직접 운영해보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김 씨가 직장에 사표를 내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꿈을 이루려고 나섰지만 자금 문제 등으로 실패하고 만 것이다.

"가장임에도 가족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한심한 처지가 돼버렸습니다. 눈앞이 막막했죠. 차마 가족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어요. 특히 아내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고요. 1년 여 동안 연락을 끊은 채 전국을 떠돌며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보냈지요."

요즘 안나와 유나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부부의 안부를 확인한다. 주말이면 병원을 찾아 엄마 병상에 함께 누워 자고 돌아가는데도 일주일 내내 김 씨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는 잘 지내요?', '아빠는 밥 먹었나요?'라고 물어도 김 씨는 선뜻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아직 어린데도 제 부모를 챙기는 아이들이 고맙고 미안해서다.

얼마 전부터 김씨는 한 정신병원 보호사로 일하게 됐다. 격일제 근무여서 하루는 꼬박 일을 하고 다음날은 아내 곁에서 또 하루를 보낸다. 한달 수입(100여만 원)으로는 병원비를 대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앞으로 얼마나 병원비가 더 들지도 알 수 없다.

김 씨와 두 딸의 소원은 함께 사는 것.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어 해요. 말을 제대로 못하지만 아내 마음 역시 마찬가질 겁니다. 저 역시 더 이상 가족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방 한 칸 장만할 능력조차 안되는 제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아직 아내에게 못해준 것도 너무 많은데…."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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