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한국과학영재학교 출신 5인방

입력 2006-07-04 07:28:43

지난달 28일 오후 대구 출신의 '한국과학영재학교' 졸업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얘기를 듣고 대구교육과학연구원을 찾았다. 낮 최고기온이 32℃까지 올라간 그날, 대구는 찜통이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김은락(19)·임남규(19)·장성호(19)·김기연(19.여)·추승우(18) 군 등 '영재 5인방' 도 그랬다. 전날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1박 2일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귀국했다는 남규 군은 벌써 미국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의 만남이라선지 등나무 그늘에서 잠시 더위를 식히는가 싶더니 금새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 더 큰 세계로

영재고를 졸업한 지 6개월. 대구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같은 고교에서 3년을 동고동락한 이들이지만 반 년이 지난 지금, 다섯 명은 저마다의 꿈을 쫓아 '더 큰 세계'로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버클리 쪽은 화학공학이 세잖아. 남규야, 오리엔테이션 어땠어?"

짧은 스포츠 머리, 앳된 웃음의 은락 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올 초 서울대 생명공학부에 입학했다 다시 UC 버클리 화학공학과에 합격한 그는 한국 대학 생활이 심드렁해 보였다. 알고 보니 남규 군과 은락 군은 같은 지산중학교 출신에 영재학교를 거쳐 UC 버클리 같은 과에까지 합격한 단짝 친구. 남규 군의 대답이 걸작이다. "교수가 입학생들 테스트 하려고 일부러 어려운 수학문제를 골라서 보여주는 눈치였는데, 솔직히 우리 학교(한국과학영재학교) 기말시험보다 수준이 낮더라. 그런데 외국 애들은 시험지 받자마자 머리부터 쥐어짜더라구."

기연 양은 다음 달 미국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론 대학 오리엔테이션을 받기 위해 출국할 예정. 그 역시 고교 졸업 후 카이스트에 입학해 다니다 유학을 결심했다. "전공은 컴퓨터 사이언스로 정했어요. 전망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성호 군은 현재 재학중인 포항공대 화학공학과에서 학부를 마칠 생각이라고 했다. 국내 대학 중 가장 인프라가 잘 구비돼 있다는 게 이유. 하지만 그 역시 대학 졸업 후에는 유학길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컴퓨터 도사로 통하는 승우 군은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영재학교에 입학했다. 그래서 다른 네 명보다 한 살이 어렸다. "사실 서울대, 포항공대, 카이스트를 먼저 생각했는데요, 그런 평범한(?) 곳보다 반도체학과를 처음 개설한 성균관대에 가장 끌렸어요. 저를 가장 원했고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줄 것 같았거든요."

▶ 내 갈 길은 내가 개척한다

다섯 명 모두 일찌감치 영재교육 코스를 밟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경북대 영재반, 교육청 심화반, 경시대회 준비 학원 등을 통해 중학교 시절부터 얼굴을 알고 있던 터였다. 기연 양은 "지산·범물 학원가에서 쟤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수재였다."며 은락 군을 가리켰다.

중학교 시절 은락 군에게는 물리가 가장 재미있는 과목이었다. 경북대 영재반에서도 물리를 택했다. 중 3때는 일반계고 진학을 놓고 부모님과 약간의 갈등도 있었다. 부모님은 장래가 보장된 의대 진학을 권유했지만 그해 여름, 답사차 참가한 한국과학영재학교 캠프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김현근('가난하다고 해서 꿈마저 가난할 순 없다'의 저자)이라는 동갑 학생이 있었는데, 그 때 벌써 유학 얘기를 하더라구요. 완전 쇼크 먹었죠. 제가 날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기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다는 결심에 영재고를 택했죠."

남규 군은 일행 중 가장 낙천적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지원한 경우. 중학교 2~3학년 때 이미 경시대회 준비 학원과 동부교육청 심화반을 거친 경험이 자신감을 줬다.

"고 1때 물리학에 푹 빠져서 프린스턴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영어 공부에 올인했어요. 1년 동안 토익·토플 책을 60권이나 풀었다니까요." 고3 때 과학문화재단에서 주최한 '대통령 과학 장학생 선발대회' 합격자 10명에 들면서 서울대에는 원서조차 내지 않았다고.

기연 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반 년간 미국에서 공부한 경험을 떠올렸다. 미국 교실의 수업 방식과 자유분방한 교육 시스템이 맘에 들었다. 중학교 2~3학년 때는 교육청 심화반에 들어갔다. 뛰어난 실력의 또래들과 겨루는 경쟁이 더욱 맘에 들었다. "그래도 역시 고교 시절이 결정적이었죠. 카이스트 교수님들처럼 유명한 선생님들의 수업을 듣다 보니 진로에 대한 시야도 한결 넓어졌어요."

성호 군은 중학교 때 경북대 과학영재반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고 1 때 잠깐 천문학에 관심을 뒀다가 다시 화학으로 돌아왔다. "이공계가 활약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에 목표는 화학공학으로 재조정됐다. 그는 카이스트 경우 영재학교 졸업생들의 진학률이 높아 일부러 포항공대를 택했다고 했다.

승우 군 역시 경북대 영재반을 다니며 정보올림피아드 준비를 하다 영재학교로 입학한 케이스였다.

▶ 특별하지 않다. 꿈을 쫓을 뿐

겉모습만으로 전혀 영재로 보이지 않았다. 운동화에 헐렁한 남방 차림. "어우 짱(짜증) 나!"를 연발하는 또래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애 어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은락 군은 배우 문근영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승우 군에게 "근영이 어떻데?" 하며 추궁해댔다.

이들 역시 공부가 쉽지만은 않다고 했다. "평소에 예습·복습 철저히 하느냐."고 공부 요령을 물었더니, "에~이" 하며 입을 모은다. 은락 군은 "전형적인 벼락치기 스타일"이라며 평소 실력으로 시험치는 영재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중학교에서 하던 대로 시험 쳤다가 미적분에서 F를 받은 적도 있다."며 "3학년에 올라와서 며칠 밤을 새고서야 겨우 A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남규 군은 "평소 수업 때 집중하다 보면 시험문제가 눈에 보인다."고 했고, 기연 양은 "기본문제가 주어지면 응용문제까지 다루는 식으로 한 걸음 더 나갔다."고 말했다. 사실 어느 것이나 일반 학생들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이 공부도사는 분명했지만 '공부벌레'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적을 한 번 못 받아도 '뭐, 다음 번에는 잘 받겠지.' 하며 스트레스를 이긴다고 했다. 관심사도 다양하고 한 번 빠지면 즐겁게 몰두하는 것도 이들의 장점이었다. 남규 군은 고교 때 밴드에서 드럼을 친 경험을 살려 버클리 대에서도 한인밴드에 가입할 계획이다. 노래를 잘 하는 은락 군에게 보컬을 제안했다. 기연 양은 요리가, 승우는 게임이 취미이자 특기라며 웃어 보였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특목고에서 의대 진학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느냐'고 슬쩍 물었다. 은락 군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과학이 돈이 안 된다면 되게 만들어야죠. 부모님들 걱정도 이해는 합니다만 기왕 이공계로 진로를 잡았으니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돼야죠." 영재들이 다른 학생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일찍부터 정한 내 진로에 자부심을 갖고 온 몸을 던지는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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