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불교④-신라 첫 사찰 구미 도리사

입력 2006-07-01 07:40:37

신라의 첫 사찰 도리사(구미시 해평면)로의 여행은 초록향기가 넘친다. '태조산 도리사(太祖山 桃李寺)'라 쓴 일주문에 들어서 논길, 못길, 산길로 이어지는 4.7km를 올라오면 하늘로 솟은 소나무들이 먼저 반기고 법당이 나중에 나타난다. 부처님의 인연법에 따라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아도화상은 한겨울인데도 오색 복사꽃이 만발한 이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이름지었다. 신라불교의 성지인 도리사에서 아도화상이 뿌린 법음은 1천500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다시 꽃피기 시작했다. 지난 1981년부터 25년여에 걸친 불사를 거의 회향한 도리사는 부처님의 생명사상과 실천적 중도사상을 실천하는 도량으로 순례객들을 맞고 있다.

◆ 놀토에 행해지는 소나무 프로그램

놀토인 지난달 24일. 도리사 인근 해평, 산동, 도개 마을 초등학생들이 와 몰려왔다. 격주에 한 번씩 노는 토요일을 맞아도 부모와 함께할 수 없는 아동들을 일선교통(대표 김학송)의 도움을 받아 이곳으로 데려와 문화체험을 하도록 배려한 도리사의 '소나무야 놀자' 프로그램에 어린이들이 몰려온 것이다. 종교에 관계없이 찾아온 어린이들은 요리, 원예요법, 자연관찰, 선체조, 다도 등을 체험하며 신나는 하루를 보냈다. 경내 설선당 수선당 등에서 진행된 '소나무 프로그램'은 앞으로 도리사가 나아갈 방향을 말해준다. 아도화상이 그 옛날 부처님 인연을 찾아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와 목숨 걸고 불법을 전했듯이, 이제 도리사는 소나무 프로그램으로 길 잃은 천사들과 새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도리사의 소나무는 솔잎혹파리 때문에 죽어갔다. 당시 군청에서는 소나무를 뽑고, 수종을 갱신하자고 했지만 도리사 주지 법등 스님은 7년 동안 수간주사를 놓아서 5분의 4를 살려냈다. 주사 구멍이 숭숭 난 채 잘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재선충이 또다시 괴롭히고 있지만 이번에도 살아난 소나무는 이곳을 지키며 어린이들의 친구가 될 것이다.

◆ 고통의 원인을 없애라

뿐만 아니다. 도리사에서는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처음 농약을 치지 않은 해는 채소를 하나도 수확하지 못했다. 해마다 나아지더니 6년째 겨우 먹을 정도로 상추와 배추, 파가 자라났다. "하다 못해 해충도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해요. 우리가 6년 동안 농약을 뿌리지 않자, 해충들도 안 거예요. 아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구나라고 알아차린 거죠." 이러한 도리사의 생명을 존중하는 농사 원칙은 바로 부처님의 진여법성에 다름아니다. 인간만 귀한 것이 아니라 만물이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으니 인간과 미물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욕심을 절제하고, 무명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온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 모든 생명과 내가 하나라는 생각을 도리사는 갖고 있다. 모든 생명은 인연을 따라 현상계에 나타난 것이니, 우리가 나서 죽는 것도 생멸이 본래 없는 공(空)의 도리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귀나 재물 지식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가라는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붓다의 실천적 중도를 아십니까

고타마 싯달타는 29세까지 인도의 태자로서 쾌락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러나 삶이 허전하고 뭔가 생산적인 게 없어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자마자 출가했다. 설산 고행 6년 만에 뼈만 남은 채 쓰러져 죽을 지경이 됐다. 그때 싯달타는 "난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이렇게 죽은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정직한 자각을 했다. 그래서 싯달타는 중도를 택해 수자타 처녀에게 유미죽을 얻어 드시고, 니련선하에서 목욕도 했다. 그러자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고타마 싯달타가 타락했다."며 부처님 곁을 떠나가 버렸고,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혼자 도(道)를 깨치는 기쁨을 누렸다. 그때의 기쁨에 대한 기록은 나중에 용수보살에게 완성돼 화엄경으로 남았다. 21일 동안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부처님이 녹야원으로 다섯 비구를 찾아갔다. 그들은 "본체도 하지 말자."고 약조했지만 부처님 법력에 압도되어 저절로 스승으로 모시면서 초전법륜이 이루어졌다. 그 부처님의 초전법륜이 인연을 따라 신라로 전해진 것이다. 아도화상에 의해서.

◆ 도리사가 달라졌다.

고구려의 승려이던 아도화상은 눌지왕 때 포교를 위해 일선군(선산) 모례장자의 집에 머물며 불법을 전했다. 지금 모례장자의 집(문화재자료 296호) 일대는 신라불교초전지마을조성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아도화상은 신자가 늘어나면서 사찰 건립지를 찾던 중 냉산 눈속에서 오색의 복사꽃이 핀 것을 보고 절을 지어 도리사라 했고, 금오산과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도리사 서대에 올라 저기에 절을 지으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직지사가 들어섰다. 20여 년 전 도리사는 단순 고졸(古拙)하고 물이 귀했다. 그러나 도리사는 달라졌다. 지하 450m에서 하루 2천t이 쏟아지는 물길을 찾아냈는가 하면, 아도화상의 흔적을 곳곳에 세웠다. 그 옛날, 설법을 할 때면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아도화상의 전법정신을 이어가는 도리사는 자연과 더불어 인성을 키워가는 21세기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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