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개신교(3)-대구 3·1운동 길

입력 2006-06-17 09: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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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민당의 수상한 법 제정 움직임을 접하면서 대구 개신교계의 성지가 된 '3·1 운동길'을 걷는다.

80여 년 전, 부지불식간에 남의 손에 넘어간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독립을 향해 뛰어들었던 계성·신명학교 학생들과 대구 개신교계 지도자들이 비밀스레 걸었던 이 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최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집권 자민당이 UN 등 국제기구의 요청 없이도 자위대를 해외로 파병할 수 있고, 또 무기까지 쓸 수 있도록 하는 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패전국 일본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군대보유를 금지하고, 전쟁을 치를 수 없도록 명문화해놓은 평화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며, 만에 하나라도 한반도가 분쟁에 휩싸이면 자기네 맘대로 일본군대를 보내 한국땅을 휘젓겠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동산동 신축 대구제일교회에서 서문시장으로 이어지는 '대구 3·1운동길'은 세계 혁명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중에 의한 비폭력 비무장 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한 역사의 현장이자 초기 개신교인들과 나라사랑 숨결이 배어있는 천국의 길처럼 느껴진다.

◇ 진심어린 말 한마디에 첫 신자 탄생

대구에 선교사가 첫발을 디딘 날은 1983년 4월 22일이다.

미국 북장로회 베어드 선교사는 선교활동의 발판을 마련코자 육로로 동래→밀양→청도를 거쳐 대구에 도착,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부산으로 내려간 뒤, 9월에는 낙동강을 거슬러 물길로 대구에 부임했다.

그러나 베어드 선교사는 별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처남인 아담스(안의와) 선교사에게 대구에서의 사역을 넘겨주었다.

아담스는 나중에 '작은 예수'라 불릴 정도로 성경에 능통하던 김기원(대구의 첫 사역자, 나중 경산 사월 대구중앙교회 등에서 목회)의 도움을 받아 사역을 넓혀나갔다.

어느날, 아담스는 뽕나무 골목에서 한짐 가득 나무를 실은 어떤 지게꾼과 부딪혔다.

나뭇가지에 '콱' 긁힌 아담스의 얼굴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늙은 지게꾼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때 아담스가 "괜찮습니다. 제가 부주의하여 미안하게 됐습니다.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마침 이 광경을 지켜본 서자명은 "아하! 야소교(당시 개신교 지칭어)란 저런 것이구나."라고 감탄하며 입교를 결정했다. 대구 첫 개신교 신자는 이렇게 탄생됐다.

◇ 생명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습니다.

종로에 임시숙소를 정하고, 대구 약전골목에 있는 집을 사들여 경북의 모교회인 대구제일교회가 들어섰다.

하지만 복음전파는 쉽지 않았다. 제사를 금하는 게 알려지자 인륜을 무시한다고 펄펄 뛰었다.

선교사들은 '산 제사론'을 펼쳤다.

개신교의 제1계명은 효도이다. 하지만, 죽은 부모가 아니라 살아있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산 제사'가 더 중요하다고 설득해나갔다.

야소교의 진리는 영생을 얻는데 있다고 하자 "서양 종교를 어떻게 동양인이 믿을 수 있느냐?"며 따졌다.

선교사들은 "생명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대구·경북의 개신교는 교육과 의료와 함께 전파됐다.

아담스와 합류한 의료선교사 존슨(장인차)은 1899년 10월 1일 구 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동산병원의 전신)을 설립, 육신의 고통을 없애면서 영혼까지 구원하는 몫을 톡톡히 해냈다.

이어 아담스는 약전골목 구 교회 강대 자리에 있던 기와집 2채를 임시 교사로 하여 계성학교를 개교(1906년 5월 1일)했다.

교장은 아담스, 교사는 이만집 한사람 이었다.

계성학교는 1908년 3월 30일 현재의 아담스관으로 옮겨갔고, 부르언 선교사의 부인(부마태)은 1907년 10월 23일 신명여학교를 개교했다.

계성학교는 또다시 새로운 한 세기를 향한 200주년의 첫걸음을 올해 내디뎠고, 신명학교는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다.

◇ 가슴이 깨어진 고통을 아십니까?

3·1운동 이전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에모리대 캔들러 총장은 "온 국민의 마음이 깨어져 고통받는, 심통(心痛)의 나라를 본 적이 있습니까? 보지 못하였다면 한국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며 지금 한국은 온 겨레가 뿌리에서부터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단통치, 헌병정치를 강행한 일본은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에게 즉결처분 권한까지 주는 바람에 기부금만 내지 않아도 즉결에 넘겨졌다.

즉결 건수는 1911년 1만 8천여 건에서 1918년 8만 2천여 건으로 급증했다.

그러면서 3·1운동의 기운은 무르익어갔다. 지역의 종교계에서는 개신교가 3·1 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다.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고려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남성정(현 제일)교회, 신정(서문)교회, 남산교회, 대구YMCA, 계성·신명·성경학교, 대구고보(경북고교) 등이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일차 시위, 3월 10일 덕산시장에서 2차 시위로 봉화를 밝혔다.

시위 참가자들은 감시망을 피해 서문시장에 집결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 사이로 흩어져 거사 예정지로 접근했고, 일부 신명학교 여학생들은 빨래하러 가는 척 대야에 헌 옷가지를 담아 버들치 냇가로 내려갔다.

당시 빨래터는 신축 제일교회 입구와 계산성당 사이의 흐르는 냇가에 있었다.

이리하여 평소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던 동산병원 언덕 솔밭은 대구 3·1운동 거사의 중요 비밀통로가 됐고, 지금 3·1운동길을 걷노라면 용맹했던 애국학생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 "하나님이 너희 나라를 구하리라" 구국신앙 온몸 실천

고통의 땅 한반도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한 3·1운동은 민족자결의 움직임과 결부되면서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 베트남과 이집트의 독립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맨손의 민중이 독립혁명을 일으킨 세계혁명사의 신기원은 대구 한복판에서도 이뤄졌고, 그 일대는 대구의 3·1운동길로 조성돼 있다.

대구 3·1 운동에는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 서문교회 정재순 목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 계성학교 김영서·백남채·최경학·최상원·권희윤, 신명학교 이재인·이선애·임봉선 등이 앞장섰다.

이들 외에 산운교회 이태학 조사, 김천교회 박제원 조사, 경산 사월교회 김무생 씨 등이 동참했다.

이만집과 이성해, 정재순과 정원조, 김태련과 김용해, 권희윤과 권영화 등 목사나 장로 가정에서 부자가 독립을 외치기도 했다.

"하나님이 너희 나라를 구하리라."는 구국신앙을 가졌던 개신교 인사 가운데 이만집 목사는 이 일로 징역 3년, 김태련 김영서 각 2년 6월, 백남채 최상원 정재순 김무생 2년, 최경학 박제원 이태학 권희윤 각 1년6월, 이재인 임봉선 각 1년을 선고받았다. 두 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의 결과 계성학교는 일년 동안 휴교를 했고, 대구고보에서는 4학년 신현욱, 3학년 백기만, 2학년 허윤실, 1학년 김수천을 비롯한 전교생 200여 명이 동참했다.

민족의 아픔과 보조를 맞췄던 현장은 대구 3·1운동길과 대구 3·1독립운동역사관(동산병원 교육·역사박물관 겸)으로 조성돼 있다.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msnet.co.kr

도움 전재규(전 동산병원 의사)

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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