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장시간 노동은 옛말?

입력 2006-06-13 09:04:48

80년대 중반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푸르던 시절, 나 역시 20대 중반으로 10대·20대여성들과 함께 구로공단의 전자회사를 다녔다. 점심 40분을 빼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40분까지 하루 10시간을 기본으로 일했다. 당시 근로기준법상 주당 기본노동시간은 48시간이었으니 매일 무조건 잔업을 2시간 한 것이다. 이것만 해도 1주일 60시간 노동인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상적인 잔업에 2주일에 한번쯤은 일요일 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3시간짜리 잔업이 제일 문제였다. 잔업은 미리 예고되기도 하지만 갑자기 요구되는 적이 많았다. 오후 4시쯤 라인 전체 소집명령이 내리면 분명히 잔업이다. 잔업 지시 앞에선 데이트약속도, 고향에서 엄마가 올라오는 것도, 몸이 아픈 것도 다 소용이 없었다. 잔업은 노동자가 동의해야만 시킬 수 있다는 근로기준법이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잔업을 못한다고 하면 완전히 역적 취급하면서 회사와 나라가 망해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며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비난했다. 주당 평균 75시간을 일하고도 불시에 내려오는 잔업 때문에 잔업 없는 날 저녁조차 자신을 위해서 의미 있게 보낼 수 없는 것이 87년 노동자 대파업 이전의 노동자의 일상이었다.

문제는 장시간 노동이 옛말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산업현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공직사회에서도 여전히 심각한 곳들이 산재한다.

현직경찰관들이 지구대 경찰의 열악한 근무형태가 행복추구권 등 국민의 기본권리를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냈다. 공직, 그것도 경찰이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헌법소원까지 낸 것을 두고 기강해이다 어쩌다 말이 많았지만 차츰 경찰의 열악한 근무형태를 개선해야 된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또 하나, 얼마 전 제주자치경찰을 모집했다. 그 중 37명을 국가경찰에서 보내주기로 했는데 지원자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 달리 그 7배에 달하는 200여명이 지원을 하여 경찰에서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1계급 진급도 있었지만 자치경찰은 주간에만 근무한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20년 전엔 생산주임의 잔업지시 하나로 20대 꽃다운 여성노동자의 모든 생활을 옭아맬 수 있었지만, 이제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열악한 근무형태를 개선해 삶의 질, 생활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요구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경찰공무원도 예외가 아닐 정도로 대세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20년 전과 비교해도 노동시간과 관련해서 많은 변화가 있는데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곳이 있다. 건설현장이다. 해뜰때부터 해질때까지, 평균 하루 13시간을 일한단다. 새벽별보고 나가서 밤 하늘 별보며 들어온단다. 어떤 아저씨는 일제 때 만들어진 관행을 해방 후 60년이 지나도 누구도 바꿔줄 생각을 안하는데 투표는 해서 뭐하고 선거는 해서 뭐하냐고 하신다. 일자체도 힘들고 위험성도 많은데다 다른 사회활동은커녕 일상적인 가족생활조차 여유있게 할 시간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 한다. 일하고 술마시고 잠자고 다시 일하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고, 재미있게 드라마보고 영화 볼 시간도 없으니 점점 멀어진단다. 소외되고 외롭단다. 대학을 나왔든 안나왔든 일용직이든, 기사든, 소장이든 건설현장에 일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단다. 사는 게 일하고 돈벌고 먹고 자는 것만이 아닌데 참 팍팍하다고 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화목한 가족생활을 위해서도, 실업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충분한 휴식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노동을 위해서도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열악한 근무형태를 개선하는데 우리 사회 모두가 관심가지기를 바란다.

박영미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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