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풍산고에 다니는 이기정(17·2학년) 군. 오늘도 논 개구리들의 합창을 들으며 교내 기숙사 이층 침대에서 잠을 깬다. 아침 6시. 세면실은 먼저 일어난 친구들로 부산하다. 운동장에는 풀냄새와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다. 새삼 시골이라는 실감이 난다. 이 군은 2년 전만 해도 자신이 농촌학교 학생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군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서울시 양천구 목동이 집이다.
"기숙사 학교에 진학해야지 마음먹고 인터넷을 검색하다 풍산고를 알게 됐어요. 서울 학교에 왜 안 갔냐고요? 서울 인문계 고교 아이들은 70%가 놀고 30%만 공부해요. 이 30%도 중간 애들이예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다 특목고로 빠졌으니까요. 당연히 교실 분위기가 별로죠. 풍산고는 생활도 규칙적으로 관리해주고 학생 수가 적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경북 안동시 풍산읍은 인구 8천 여명의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이 요즘 한 고등학교로 떠들썩하다. 한 때 학생이 없어 폐교 직전까지 몰렸던 풍산고가 이제는 외지 학생들이 몰려드는 새 명문으로 도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2천여 명에 달했던 학생이 10년 만에 100명으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단체 수학여행은 고사하고 졸업앨범조차 만들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말 다했죠." 윤영동 교장의 말이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풍산고는 대학진학을 꿈꾸는 동향의 학부모들에게 그냥 '시골학교' 일 뿐이었다.
위기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좁은 지역에서 활로를 찾을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인재가 몰리는 학교로 만들어보자.' 2002년 6월 '자율학교' 인가를 받고 기숙사 중심 학교로 변신했다. 재단인 (주)풍산 측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남·녀 2개 동의 기숙사를 새로 짓고 헌 교사를 리모델링했다. 급식소는 깔끔한 통유리 건물로 신축했다. EBS 방송 청취를 위해 컴퓨터 80대를 들였다.
입시 위주의 엄격한 학업관리 전략은 주효했다. 현재 전교생 270명 가운데 3학년 1개 실업반을 제외한 대부분이 기숙사생. 아침 6시에 기상하면 밤 11시 30분까지 공부가 이어진다. 원칙적으로 월 1회만 귀가가 허락된다. 야간 자율학습은 철저한 수준별이다. 영어·수학·국어·논술 등을 수준에 따라 5개 반으로 나눴다. 학원강사 5명도 초빙했다. 이준설 자율학교 운영부장은 "'저 학교는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성적 올릴 수 있겠다'는 확신을 심어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2004년 신입생 90명 가운데 10명이던 타 시·도 출신 학생은 이듬해 31명으로 늘었고, 올해 다시 46명(50%)으로 늘었다. 현재 1학년생 중에는 서울·경기 출신이 31%, 5대 광역시 출신이 13%나 된다.
이 부장은 "현재 고3 재학생 경우 1학년 때 치른 전국연합학력 평가에서 언어·수리·외국어 3개 과목의 1, 2등급 누적 비율이 15%였으나, 올 3월 시험에서는 23%로 올랐다."며 "2학년생은 같은 기간에 25%에서 38%로 늘어나는 등 해가 갈수록 학업이 향상되고 있다."고 기대했다.
입학생들에게는 뚜렷한 소신이 있었다.
수석으로 입학한 1학년 이준언(16·경기도 고양시) 군은 중3 1학기 때 일찌감치 이 곳으로 마음을 굳혔다. "평준화된 수도권 학교는 분위기가 별로고 특목고에 가려니 내신이 걱정됐다."는 것이 이유. 제주도 출신의 문지혜(16) 양은 먼저 입학한 사촌언니의 추천으로 입학을 결심한 경우다.
2학년 박명수(17·대구 성서) 양은 "중2 때 1년간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다 귀국했는데 다양한 커리큘럼에 끌려 풍산고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 양은 아랍어를 공부해 영어와 아랍어 실력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또박또박 포부를 밝혔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 자율학교란
교육과정 운영, 학생 선발, 교과서 사용 등에서 폭넓은 자율성을 갖는 학교다. 대학 진학 또는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 모두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 학생 선택(적성)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특징. 전국에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 등록금은 일반계 고교와 비슷한 수준이다. 자립형 사립고와 달리 재정 지원을 받는다. 경북에서는 성주고, 풍산고, 영남삼육고, 삼성생활예술고, 안동생명과학고, 금오공고, 경주화랑고, 포항예술고 등 8개교가 자율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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