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광장] 6·15와 6·25

입력 2006-06-12 08:35:32

6.15와 6.25의 관계를 냉철히 다루는 모습은 남북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6주년과 56주년, 이제 그것은 올바른 시대정신을 위해 요구되는 일이다. 남녘의 통념은 6.15와 6.25를 무관하게 여기며 6.15를 남녘 민주화세력의 기념비로 인식한다.

엊그제 6.15 기념식에 모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축하객의 표정에도 그렇게 씌어 있었다. 하지만 그 통념에는 왜곡과 과장이 울퉁불퉁하다. 김대중이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 무리하게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에 매달렸다는 따위를 들춰내려는 것이 아니다. 결코 6.25와 분리할 수 없는 6.15의 운명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둘은 분수관계로 태어났고, 분모는 6.25다.

이러한 태생의 조건은 6.15선언의 핵심인 '화해와 교류를 통한 평화적 통일'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양김의 통일방법론 지식 겨루기 주제로나 알맞았을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는 핵심 합의를 보증하려는 일종의 증빙이었다.

'평화적 통일'은 전쟁을 반대한다. 이에 대한 남녘의 가장 폭넓은 지지세력은 6.25전쟁의 참혹한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퍼주기'라며 험담을 퍼붓는 사람들도 '혹시 북녘이 이판사판으로 나오면 어쩌나'라는 설득에는 한번쯤 숨을 고른다. 이렇게 6.15는 6.25와 분리될 수 없다. 다만 날이 갈수록 분자는 커지고 분모는 작아져야 언젠가 '1'로 거듭나게 되며, 남북이 함께 그 방향으로 갈 때 희망으로 가는 길이다.

'평화적 통일'은 흡수통일을 반대한다. 전쟁을 일으켜 폐허로 돌려 받았던 북녘도 전쟁의 참상을 기억할 테지만, 평양정권은 패전으로 몰리는 전투보다 더 속수무책으로 흐를지 모를 흡수통일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기나긴 화해와 교류의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나 갑론을박해야할 통일방법론에 대한 해법까지도 마치 할아버지의 가훈 액자처럼 미리 달아놓아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녘의 경제성공이 평양정권에게 흡수통일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6.25 때부터 이십여 년 동안은 줄곧 북녘 경제가 남녘 경제보다 우위를 지켰다. 그때 평양정권은 흡수통일을 꿈에도 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지만 박정희 정권은 6.25의 기억과 때때로 터진 김일성 정권의 무력도발을 개발독재 통치의 한 배경으로 활용하면서 남북의 경제실력을 완전히 역전시켜 '흡수통일'이라는 미래의 말을 잉태시켰다.

이렇게 6.15가 남녘 민주화세력의 기념비라는 통념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 '우리가 산업화와 경제개발에 실패했더라면 뒤로 갖다줄 4천억 원이 없어서 남북정상회담도 안 됐을 것'이라는 비판은 과장의 본질을 놓친 격한 감정의 발산이다. 과장되지 않은 사실은 평양정권이 남녘의 역동적인 정치민주주의도 경제격차처럼 경계한다는 점이다.

북녘은 6.15선언에 이어 '6.15시대'란 신조어를 외쳤다. 요즘은 남녘에서도 더러 6.15시대를 논의한다. 한국지성의 맥을 형성해온 '창작과비평'은 지난 봄의 40주년 기념호에 '6.15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특집을 꾸렸다. '이미 6.15시대가 와 있다'라는 주장으로도 들리는 제목이었다.

6.15선언이 남북 양측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며 남북교류의 빈도와 내용을 발전시키고 한반도 안전을 더 두텁게 해준 역할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 6.15시대는 오지 않았다. 진정한 6.15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내 눈에도 그 관문은 아득히 멀어 보인다.

6.15시대를 염원하는 것과 이미 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6.15와 6.25의 분수관계가 해소되고 남북 체제의 현격한 이질성을 넘어서기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노력하는 즈음에야 6.15시대는 발을 디딘 현실로 성립되는 것이다.

한반도 분단체제를 세계적 지배체제의 차원에서 통찰하는 학자들에게도 먼저 남북의 내부를 실상 그대로 엄정히 살피는 정직한 눈이 요구된다. '지금 여기는 6.15시대'라는 말에 동의해야 역사적 선구의식과 진보적 도덕의식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일은 개인이 누릴 이상(理想)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상에 갇혀 조급해지면서 내부에 정직하지 못한 시선으로는 더 이상 시대정신의 리더십을 창조할 수 없다. 아니, 훌륭한 통치의 조언으로도 쓰지 못한다.

이대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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