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올이가 좀 빨리 걷습니다. 조심해서 따라오세요."
오전 7시 30분. 대구지하철 1호선 방촌역. 여덟살 '한올이'를 앞세운 허경호(27·대구광명학교 교사) 씨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하철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서더니 진천역 방향으로 들어서서 지하철 출입구 앞에 선다. 오전 8시. 명덕역에서 내린 경호 씨.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202-1번, 혹은 650번 시내버스로 갈아 탄다. 목적지는 대구대 대명동캠퍼스 내 대구광명학교.
1급 시각장애인 경호 씨의 출근길. 앞이 보이지않는 그가 거침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차들이 지다다니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시내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은 안내견인 '한올이'를 믿기 때문.
이날도 '한올이'는 1시간여만에 경호 씨를 일터까지 정확히 안내했다. 지하철 안내방송에 따라 경호 씨가 타거나 내리면 '한올이'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정해진 출입구를 찾는다. 시내버스를 탈 때도 한몫 단단히 해낸다. 경호 씨보다 먼저 버스에 올라 빈 자리를 찾는다.
"한올이는 5년동안 단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살아온 인생의 동반자이자 은인입니다." 경호 씨는 다섯 살 때 원인모를 병으로 사시가 심해지면서 시력을 잃었다.
'한올이'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외출할 때마다 전쟁을 치렀다. 행인들이나 가로수, 전봇대 등에 부딪혀 다치기 일쑤였으며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도 적잖았다. 횡단보도에선 잠시만 팔꿈치를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해 무안한 경우도 많았다.
경호 씨의 인생은 지난 2001년 '한올이'를 만나면서부터 180도 달라졌다. 우여곡절 끝에 삼성화재안내견학교로부터 한올이를 무료로 분양받았다. 하지만 한올이가 쉽게 마음을 열지않았다. 처음엔 이곳저곳을 다니며 영역표시를 하고 배설도 아무데나 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화장실 이용법도 가르치고 길을 가다 영역표시를 할 땐 잠시 따라갔다 다시 갈 길을 재촉하는데 익숙해졌다. 한올이의 숨소리, 울음소리만 들어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통하자 세상이 달라졌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한올이를 앞세워 가고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도 한올이 덕분에 쉽게 친해지게 된 것. 그는 "한올이는 나와 세상을 소통하게 해주는 통로"라고 치켜세웠다.
2년전부터는 새로운 취미생활도 시작했다. 그는 일과를 마치고나면 대구시 남구 대명동 명덕네거리 인근의 드럼스튜디오로 향한다. 드럼치는 감각이 누구보다 좋은데다 하루 4~5시간씩 맹연습을 한 덕분에 이젠 제법 수준에 올랐다. 취미생활도 함께 하는 것일까. 한올이는 경호 씨가 드럼을 두드리는 동안에도 옆에 앉아 자리를 지킨다.
동화같은 이야기지만 한올이는 중매장이 역할까지도 해냈다. 3년 전 여자친구를 만났을 때 둘은 '한올이'로 인해 더 쉽게 마음을 열게 됐다. "처음엔 한올이가 질투도 했는데 이젠 둘 관계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경호 씨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한올이'가 안타까울 때도 많다. 직장을 구한 지난 3월부터 일하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떨어져 있어야 하기 때문. 그럴 때면 사무실 계단 아래 임시로 만든 집에다 머물게 한다. 한올이는 처음엔 벽에 머리를 박고 삐져있거나 딱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는 등 스트레스가 심했다. 이젠 어느정도 적응이 된 상태. 경호 씨의 퇴근만 조용히 기다린다.
경호 씨가 더 안타까워 하는 건 수컷인 '한올이'는 태어나자마자 불임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가끔 남성성을 드러내 보기에 안쓰럽고 동물의 본성을 제거한 것 같아 죄스럽기까지 하다. '한올이'는 추운 캐나다 동부지역이 조상들의 본 무대라 무더운 대구의 여름을 나기도 힘들다. 땡볕에 한참을 걷다보면 침을 흘리기 일쑤. 그래도 경호 씨의 안전만은 놓지 않는다.
'라보라도 리트리버' 종의 평균수명은 17∼20년. 한올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10년 고작인 것도 때론 경호 씨를 견디기 힘들게 한다. '드럼 연습'을 끝낸 밤 10시. 경호 씨는 가로등 아래에서 '한올이'를 쓰다듬으며 한마디 건넸다. "걱정 마. 누가 뭐래도 그때까진 넌 내 가족이자 친구, 동반자야."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