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새마을운동' 인가] ⑬어촌 새마을운동

입력 2006-06-06 10: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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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장 조성 통해 가난 대물림 '끝'

김해 김씨, 평해 황씨, 월성 이씨 등 3개 씨족 중심의 집성촌으로 돛단배로 고기잡이를 하던 전형적인 작은 어촌, 포항 청하면 이가리는 1970년 이전 인근 10개 마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마을이었지만 1975년 이후부터 전국에서 손꼽을만한 부자 어촌으로 거듭났다. 어촌 새마을운동을 알차게 진행한 덕분이다.

"주민들이 나 하나 희생하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다. 마을 발전을 위해 함께 나서자며 의기투합 했습니다. 수 백 년 대물림한 가난도 힘을 합치니까 길지 않은 시일내에 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당시 새마을지도자로 '새마을훈장 협동장'까지 받은 김호달(73) 씨의 말이다.

당시 이가리는 주민 모두가 어민이면서도 정작 마을 앞 공동어장은 포항의 대형 업자들에게 임대하고 그들 밑에서 날품팔이 했다. 이는 가난의 대물림이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지도자들은 정신개혁을 우선시 했다. 김호달 씨는 "뭉치고 화합하자, 공동의 발전을 모색하자는 등의 말이 주민들에게 먹혀 들면서 몸으로 하는 일은 저절로 풀려나갔다."고 추억했다. 현재의 동장 김용수 씨는 "당시 새마을운동에 동참했던 60, 70대 노인들은 당시의 성공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전했다.

이가리는 새마을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 수산업사에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다. 75년 일찌감치 공동어장을 주민 직영제로 전환하면서 매일 새벽 5시면 너나 없이 새마을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닷가로 나가서 공동어장에 돌을 던져 넣었다. 요즘은 인공어초가 널리 보급됐지만 그 때는 어장에 돌을 던져 어초를 대신한 것. 전복·성게·미역 등 해산물이 풍작을 이루던 어장을 직영으로 전환한 첫 해엔 수익금이 종전 연간 300만 원에서 790만 원으로 두배 가량 늘었다. 이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76년 10월 김호달 씨는 정부 청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동어장 자원개발로 오늘을 이룩한 이가리 어촌계'를 주제로 성공사례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슬라이드 필름을 본 뒤 "주민들은 열심히 하는 데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것 같다."면서 방파제 건설을 지시, 더욱 확고한 마을발전의 토대를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이가리는 전국 어촌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고, 당시 수산청은 전국 어촌계장 회의를 이가리에서 열어 타 지역 지도자들이 보고 배우도록 했다.

당시 200여 가구의 울진 기성면 기성리에도 어장조성 붐이 일었다. 당시 '뗏마'라는 작은 무동력선에 한 두 사람이 타고 나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게 고작이었지만 바다에 그물을 고정시키는 어장 조성은 5천~6천만 원이 들어야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함석이나 슬레이트 집 한 채 값이 100만 원 정도하던 시절이라 한 사람이 투자하기엔 너무 부담이 커 집안 형제들이나 마음 맞는 이웃들이 수협에서 돈을 빌려 공동투자 형태를 취했다.

이 마을 권흑인(77) 씨는 "모험이었지만 돈이 되니까 너도나도 나섰어. 어장을 수족관으로 인식하면 돼. 그물 하나 달랑 들고 망망대해에 나가 고기잡던 방식에서 수족관에 든 고기를 매일 가서 일정량을 건져오는 방식으로 바뀐 거야. "라고 말했다.

당시엔 어자원이 풍부해 나가기만 하면 만선일 정도로 어장엔 '물반 고기반' 이었다. 아낙네들도 판매일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면소재지인 척산리 등 인근 농촌마을로 가서 현금을 받고 팔거나 감자·보리 등과 바꿔 오곤 했지만 생산량이 많아지자 손수레에다 싣고 20여km나 떨어진 평해 등으로 팔러 다녔다. 돈을 번 어민들은 무동력선에서 동력선으로 교체하는 등 어선현대화에 나섰고 월급쟁이 어민도 나올 정도로 호황이 이어졌다.

당시 월급쟁이 어부생활을 한 박만희(75) 씨는 "군대 제대하고 할 게 없던 차에 어장조성 바람이 불면서 배들이 늘어났고 일손이 달리다 보니 선원들을 모집하게 된 거지. 당시로선 한 달에 20~30만 원 받을 정도로 꽤 괜찮았다"고 기억했다.

어선현대화는 어획량 증가로 이어졌고, 고기를 말려 대도시에다 내다파는 상인들을 생겨나게 했다. 또 이를 보관하는 창고업자와 운송업자도 하나 둘 활동하게 만들었고 어민들은 번 돈으로 농토를 구입했다.

정영규(65) 씨는 "대부분이 반농반어(半農半漁)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고기잡이로 돈을 벌어서는 어한기에 농사를 지으려고 대부분 인근 마을에 농토를 샀지지만 워낙 고기가 잘 잡히다 보니 어민들이 지주가 되고 정작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고 당시의 풍요로움을 말했다. "지금도 기성들 지주의 상당수가 어민들이고 전부 그 시절에 사 놓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울진.황이주기자 ijhw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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